강호행차/모스크바

모스크바강의 표트르대제 동상(The Peter the Great Statue)

가루라 2014. 1. 21. 12:29

모스크바 중심을 가로 지르는 모스크바강과 보두쯔보드니운하(Vodootvodny)의 서부합류지점에 우뚝 서있는 거대한 동상

그것은 17세기초까지도 유럽의 변방으로 아시아의 미개한 족속 중 하나로 천대시 되었던 러시아를

오늘날의 유럽 강대국 반열에 올려 놓음으로써 대제의 칭호를 부여 받은 표트르대제이다.

 

모스크바는 동상의 도시라 할만큼 많은 동상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지만

표트르대제동상(The Peter the Great Statue)은 그 규모에 있어서는 단연 최고라고 볼 수 있다.

1997년에 세워진 이 동상은 98미터로 높이로는 세계 8위이며 

무게도 스텐레스와 황동, 구리 600톤을 포함하여 약 1,000톤이나 된단다.

그루지아인 디자이너 주랍 쩨레텔리(Zurab Tsereteli)에 의해

표트르대제가 창건한 러시아해군 300주년을 기념하여 디자인되었다고 하는데

건축 초기부터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2008년 11월 버추얼 투어리스트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추한 10대 건축물 중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0년에는 포린폴리시매거진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추한 동상들 리스트에 등재되기도 하였단다.

 

현지에서 사진으로 담을 때는 몰랐는데 그 얘기를 듣고 보니 동상의 형상이 캐리비안해적의 유령선처럼 괴기스럽게도 보인다.

선입견에 의한 관념적 포로가 된걸까 ?

<달리는 차안에서 담은 동상>

모스크바 사람들은 모스크바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해서 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긴 표트르대제에게

왜 찬사를 표하는 뜻으로 동상을 세우는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디자인한 주랍 쩨레텔리가 모스크바 전임시장 유리 루즈코프(Yury Luzkov)의 비호 아래

구세주그리스도대성당, 마네쥬광장, 포클로나야 고라의 전쟁기념관 등 예술건축물을 재건 또는 복원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커미션을 챙긴 것으로 알려져 더욱 말썽이 일기도 했었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2010년 유리 루즈코프시장이 퇴임한 후

모스크바당국은 이 동상을 제거하여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재설치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부되었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정은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과 정보에서 비롯된 것인데 러시아 역시 이를 벗어나지 못하나 보다.

<모스크바 강변도로 차안에서 담은 표트르대제동상> 

더욱 최악인 것은 비록 디자인한 쩨레텔리는 이를 부인했지만 한발 더 나아가

이 동상이 당초 19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500주년을 기념할 의도로 디자인되었는데

프로젝트를 추진할 미국 고객을 찾지 못해서 표트르대제를 표징하는 주제로 바꾸어 다시 제안하였다는 설이 강력하게 제기되기도 했었단다.  

 

얼어붙은 모스크바강처럼 진실은 꽁꽁 숨었으니 위와 같은 얘기들이 단순한 낭설인지 사실인지는 알 수가 없다.

<모스크바강을 가로 지르는 구세주그리스도대성당 앞 다리 위에서 담은 모스크바강과 표트르대제동상> 

추문에 가까운 숨겨진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역사적 조형물은 아니지만 여행자의 시선을 확 끌어 당길만큼 거대한 규모와 설치된 위치만으로도

러시아를 대변할 가장 최고의 인물 표트르대제의 이미지를 동상에 덧씨울 수 밖에 없다.

표트르(Pyotr 영문표기 Peter)대제는 1625년 5월 로마노프왕조 2대 황제인 알렉세이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알렉세이 1세는 많은 배다른 자녀들을 두었는데 표트르가 겨우 3살 때 죽고

왕위를 계승받았던 장자 표도르도 일찍 죽자 왕위다툼이 치열해진다.

그 중 왕위에 가장 욕심을 내었던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복 누나였던 소피아공주다.

결국 종국에는 구데타에 실패하고 그녀를 옹립했던 장군들의 효수된 끔찍한 머리와 함께 노보데비치수도원에 유폐되어 최후를 마친다.  

 

그런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의 암운을 미리 감지한 표트르대제는

10대 때는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전쟁놀이나 궁정놀이나 하며 관심밖으로 벗어나는 지혜를 보이고

장성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서부유럽을 떠돌며 근대화된 유럽을 배우고 직접 체험했던 준비된 지도자였다.

소피아공주의 구데타에 반기를 든 군부의 옹립으로 단독 황제가 되어 귀국한 후

그는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강력한 지도자로써 대제의 칭호를 받고

러시아의 과감한 개혁과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개혁방식에 있어서 그와 뜻을 달리했던 아들 알렉세이의 망명과 회유에 의한 귀국, 그리고 사형선고

뒤이은 돌연한 사망으로 인하여 인간으로서 흔들리고 결국 지도자로서도 총기를 잃고 생을 마감하고 만다.    

비록 지도자로서는 큰 족적을 남겼을지라도 인간으로서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을 표트르대제

 여행자는 그의 동상을 두고 새삼 인간의 불완전성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