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세상 사는 이야기

호박 한덩이와 세상인심

가루라 2014. 12. 14. 23:09

작년에 호박죽을 쒀 먹을 때 마당에 버렸던 호박속에서

올 봄 호박싹이 여럿 돋았습니다.

어린 시절 할아버님께서 호박을 심으실 때

구덩이를 깊이 파고 밑거름을 충분히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생각이 났습니다.

10미터 이상 길게 자라는 호박덩굴에 끝까지 영양이 잘 공급되어야

호박도 실하게 자란다고 말씀하셨었죠.

여럿 돋아난 싹을 모두 솎아주고 실하게 생긴 싹만 하나를 남겨두었습니다.

미리 구덩이를 파고 심었던 것이 아니었던 탓에

주위를 돌려서 깊이 파고 화원에서 사왔던 계분과 음식물찌거기를 깊게 묻어주었죠.

 

경작의 기쁨은 이런 것인가 봅니다.

덩굴이 쑥쑥 자라더니

여름부터 예쁘고 동그란 호박이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햇볕을 잘 받도록 덩굴을 담장 위로 올렸더니

덩굴줄기는 더욱 진한 녹색으로 실하게 변해갔습니다.

아, 제 손으로 직접 키운 애호박을 따서 나물로 무쳐 먹는 기분이란 !

그러나 여기까지였습니다.

집사람이 먹기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따지 못하게 했던 호박은

노랗고 쭈글쭈글하게 변하고 떨어진 호박 속에는 알 수 없는 구더기가 우글거렸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호박과실파리라는 놈의 소행입니다.

호박꽃이 수정될 때 꽃 속에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우는 얄미운 곤충입니다.

 

결국은 덩굴에 달려서 기대감을 잔뜩 부풀게 하던 대여섯덩이 중

단 한개만 남아서 진한 녹색으로 몸집을 키워갔습니다.

이웃집 할머니들은 괜히 손 타게 될 터이니

빨리 따서 먹어야 한다고 성화셨지만

커다란 호박이 담장 위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재미를

우리만 누리기에는 도시 인심이 너무 삭막하다고 생각했었죠.

우리집 2층 베란다에서 빤히 내려다 보이는 담장 위에서

하루 하루 그렇게 몸집을 키우고 노랗게 익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도 우리처럼 커지는 기쁨, 익어가는 기쁨을 같이 누리기를 바랬습니다.

적어도 세상의 인심이, 세상의 양심이 그렇게 성숙해 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거실에 앉아서도 빤히 보이는 열린 공간이었기 때문에 더욱 믿었죠. 

 

우리가 누리고자 했던 꿈이 너무 과분한 것이었을까요?

사람의 왕래가 그리 많지 않은 골목이라 너무 큰 기대를 했었던 탓일까요?

 

어느 날 담장 위에서 떨어져버린 세상의 인심, 세상의 양심

꼭지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커다란 호박

이제 막 노릇노릇 익어가던 호박이 없어져버린 것을 확인했던 날

실망하는 제게 집사람은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냅니다.

 

가져갔던 사람이 온 가족 함께 맛있게 먹었을 것이기에 더욱 기쁜 일이 아니냐고...

 제가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나 봅니다.

하느님도 아니면서 세상의 양심을 시험하려 했으니...

'좋은 글 > 세상 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생과의 조우  (0) 2015.06.06
비둘기  (0) 2015.04.16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  (0) 2014.10.13
동행(同行)  (0) 2014.09.13
벽난로에 대한 단상  (0) 2014.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