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가는 길 근 50년만에 다시 찾은 송강정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의 초등학교를 다녔던 탓에
재학동안 단골소풍지였던 송강정에 대한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있었습니다.
강산도 벌써 5번은 변했을터
옛날 기억 속의 송강정은 전혀 없습니다.
제 기억이 퇴색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이 송강정과 주변의 형세가 비뀐 것일까요?
당시에는 아랫쪽으로 건물이 하나가 더 있고
그 사이가 넓은 공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실은 다르군요.
어쩌면 정자보다는 숨겨진 보물찾기 쪽지에 더 관심을 빼았겨
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송강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관동별곡 등을 배우고서야
비로소 송강정의 존재의 의의를 알았을뿐
초교시절에야 송강이 어떤 사람이고, 송강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으니까요.
송강정은 정철이 1585년 동인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직에 물러나 창평에 머무르면서
이곳에 초막을 짓고 죽록정(竹綠亭)이라 하였던 것을
송강이 떠난 후 1770년에 후손들이 그 자리에 정자를 짓고 송강정이라 불렀답니다.
그래서 송강정에는 정면에 붙은 편액 이 외에도
측면에 죽록정이라는 편액이 하나 더 걸려 있습니다.
송강이 4년간 이 곳에 머무를 당시 식영정, 환벽당을 오가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시가를 지었습니다.
사실 송강의 생애를 보면 참 굴곡이 많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귀양과 복직을 반복하는 그처럼 극적인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탄 사람이 송강 외에 몇이나 있을까요?
타고난 성품으로 인해 직설적이고 서인의 영수로써 자신의 노선을 분명하게 하여
늘 동인의 타겟이 되었고 결국 강화도 유배지에서 명을 달리하였지만
그가 가사문학에 남긴 족적은 가히 태두임에 틀림 없습니다.
고교시절 교과서에 실린 그의 4편의 가사와 장진주사 등 시조는
지금도 몇 구절을 기억할만큼 달달 외워야했으니까요.
정자는 정면, 측면 각3칸씩에 단층 팔작지붕의 기와집입니다.
정면과 양쪽에 마루가 있고 중앙에 방이 있는 중재실(中齋室)구조입니다.
아마 조선시대 정자의 대부분이 이런 구조였던가 봅니다.
240여년을 건너 뛰어 울창해진 송림 속에 고즈넉이 앉아있는 송강정
편평한 자연석들을 쌓아 정겹게 만든 돌계단을 오르면 나즈막한 동산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엄청 키가 커진 송림에 둘러쌓여 있지만
당시에는 바로 앞을 흐르는 죽록천과 평야를 굽어 볼 수 있는 산세 좋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영상강의 상류인 죽록천 위로 유산교라 부르는 다리가 지납니다.
일제시대에는 광주와 담양을 잇는 철교의 교각만 유산교와 나란히 서 있어서
우리는 유산교보다는 쌍교로 불렀었습니다.
건너 보이는 하상에 지금은 잡풀로 우거졌지만
1960년대에는 하얗고 깨끗한 모래가 가득해서
여름이면 모래찜질을 하려는 인근 주민은 물론 광주 시내에서도 즐겨 찾던 곳이었습니다.
70년대 중후반부터 국내에 목축업이 성행함에 따라
안타깝게도 맑은 물과 하얀 모래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해 만들어낸 폐기물들로 인해
스스로 보유하고 있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하나 둘 잡아 먹고 있는 것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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