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국내명소

담양 죽녹원, 힐링의 산책길

가루라 2014. 9. 9. 13:13

담양의 명소라고 알려진 죽녹원을 찾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인 2003년도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대나무 숲인데다가

어린시절 고향집을 둘러싼 넓은 대밭 속에서 자란터라

대나무 숲 자체에 대한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다만 사라진 고향집 대밭과 함께 잊고 있었던 어린시절 대밭 속 추억들을

혹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찾은 것입니다.

고향집의 사라진 대밭과는 달리 죽녹원은 얕으막한 야산에 조성되어 있네요.

평지에 있었던 고향집 대밭은 어린 저의 시야각에 끝이 보이지 않고

늘 컴컴한 어둠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죠.

 

대밭 속에는 쌀가지(삵)며 족제비며 심지어 여우까지도 살아서

아침이면 마당 한 켠에 여우똥(?)으로 여겨지는 하얀 배설물을 남겨 놓기도 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간밤에 하얀 백여시(여우)가 마루에 올라

문살에 붙여 놓은 쪽유리를 통해 방안을 빤히 들여다 보다 갔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옛날 한옥은 방안에 앉아서 마당을 내다 볼 수 있게

앉은 높이의 방문 문살에 가로세로 약 한 자 길이의 유리를 붙여 놓았었습니다.)

심지어 빨갛게 눈에 불을 켠 개호랑이(아마도 삵을 말씀하신게 아닌가 싶다)도 왔다 갔다 하셨죠.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만 그런 공포스러운 얘기를 들은 날은

사랑채 밖에 붙어 있는 화장실 가는 게

힘들고 무서워서 삼촌들을 깨워 같이 가곤 했었습니다.

그렇게 밤이면 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조차 공포스러웠던 대밭이었지만

어린 형제들과 제게 여름날의 대밭은 둘도 없는 놀이터였습니다.

대나무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가면

어린 아이의 몸무게를 못 이긴 대나무가 옆으로 몸을 누이고

그러면 또 옆의 나무로 옮겨 다니는 일종의 타잔놀이 같은 짜릿한 것이었죠.

대나무의 탄성은 20~30kg정도의 어린이의 몸무게에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았으나

어머님은 양다리와 한손만으로 대나무에 매달리는 장난을 위험하다고 말리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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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정(義鄕亭)

제8길 선비의 길

제4길 추억의 샛길

여름에 지상에서 1~2미터 높이의 대나무줄기에 대나무 평상 다리 네귀퉁이를 매달아 놓으면

대밭 속의 평상은 원두막처럼 세상없이 시원한 피서지였습니다.

에어콘은 커녕 선풍기도 없었던 시절

더위를 날릴 수 있는 바람이라곤 고작 부채에 의존하던 그 시절에

부채도 필요없는 피서지인 대밭 속은 오히려 한기를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대밭을 기대했던 제게 죽녹원은 색다른 경험을 맛보게 하네요.

죽녹원은 전체 면적 약 31만㎢중 약 16만㎢의 대나무숲에 각각 의미를 부여한 8개의 산책로와 정자를 만들고

나머지 약 10만㎢에는 남도 가사문학의 산실인 정자들과 남도소리 전수관, 죽로차 교육장, 한옥체험관 등으로 구성된

죽향문화체험마을이 있습니다.

비록 더위와 귀경시간의 제약 때문에 제대로 둘러 보지 못했지만

대나무의 효용을 모르는 세대들은 물론 그 가치를 잊고 있던 중장년 세대들에게도

각각 자신의 위치에서 좋은 추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명소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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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길 철학자의 길 

죽림폭포

제5길 사랑이 변치 않는 길

사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메마른 느낌의 프라스틱제품이 주류를 이루기 전까지

우리 생활에서 사용하던 생활용기 대부분은 대나무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죽세공품을 만들기 위해 매년 고향집 대밭의 대나무를 사려는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었고

대나무 숲은 가계에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산의 하나였습니다.

일제시대 때 대나무광주리를 팔러 평양까지 다니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대나무 줄기를 가늘게 갈라 대나무 바구니, 채반, 석작 등을 직접 만드시기도 하셨지만

프라스틱제품에 밀려 더 이상 팔려 나가지 않는 대나무에 속상해 하실 때쯤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상전이 벽해된다더니 고향집을 둘러싸고 있던 넓다란 대밭도 이젠 사라지고

그 자리엔 다른 시설물들이 들어섰네요.

참 그러고 보면 저도 제법 멀리까지 왔나 봅니다.

그렇게 급변하는 세태 속에서 제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것들을

벌써 박물지에서나 찾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안타까운 추억들은 결국 대나무 숲에 남겨질 뿐입니다.

요즈음 세대들에게 기억될 대나무 숲은 현대적 느낌의 산책길이 되겠죠.

 

현실세계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이 씻김을 받을 수 있을만큼 조용하고 상큼한 공기

작은 바람에도 스치는 댓잎들의 속삭임에 귀기울이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산책길

죽녹원의 운수대통길, 죽마고우길, 샛길, 추억의샛길, 사랑이변치않는길,

성인산오름길, 철학자의길, 선비의길 등

이름은 몰라도 시원한 대숲 바람과 댓잎의 속삭임으로 기억될 산책길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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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정 

죽향정 

산책길안내판 

산책길안내판 

시설표지판 

대나무 숲 산책을 끝내고 죽향문화체험마을을 서둘러 둘러 봅니다.

<죽향문화체험마을 가는 길>

죽향문화체험관은 담양을 중심으로 송강 정철의 송강정, 식영정,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 소쇄공 양산보의 소쇄원 광풍각 등

남도 가사문학의 산실이었던 정자들을 지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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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정(松江亭) 

한옥체험관 

남도소리전수관

광풍각(光風閣)

각각의 정자들은 본래 강, 계곡, 평야 등을 굽어 볼 수 있는 낮으막한 구릉지 위에 있지만

지형적으로 약간 경사진 넓은 골짜기 안에 경사를 따라 한데 지어 놓아서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광풍각 가는 길>

오랜 시간이 흘러 시비공원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면

그 숲을 따라 난 좁은 소로 구비마다 세워진 시비(詩碑)를 통해서

 수백년의 시공을 초월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의 시상(詩想)과 공감을 이루는 길이 될 것입니다.

<식영정 가는길>

식영정과 면앙정을 끼고 만들어진 연못과 나무데크로 조성된 가교

한국식 정원의 양식을 적용한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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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림헌(雲林軒) 

식영정(息影亭) 

면앙정(俛仰亭) 

연못 가의 키 큰 부들과 수면 위에 납짝 엎드려 핀 수련

클로드 모네의 그림 <수련>을 그대로 물 위에 그려 놓은 것 같습니다.

 

면앙정과 연못 

식영정과 연못 

<식영정>

<청죽헌(靑竹軒)>

죽녹원 주차장에서 입장하면 정면에 보이는 넓은 한옥 담장

임진왜란 때 고경명 장군 등이 담양에서 최초로 의병을 거병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임란창의기념관이랍니다.

임란창의기념관의 일부 건물 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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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과 전시관

추성관

임란창의기념관 정면

식영정 마루에 앉아 연못을 내려다 보는 관람객

죽녹원 산책길을 걷고 또 걸으며 얼기설기 얽혔던 많은 생각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여 죽녹원의 소회로 갈무리할 수 있는 멋진 휴식공간입니다.

 

대나무 숲길은 대나무숲길대로

가사문학의 산실이었던 정자들과 시비들로 채워진 시비공원은 또 그 나름으로

볕 좋은 가을 날 자연 속에서 나를 돌아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죽녹원입니다.

 

올 가을 남도로 여행을 떠나는 길이 있으면

꼭 한번 들러보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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