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에서의 주말 여행의 마지막,
대관령 양떼목장을 출발하여 봉평 읍내
원조라고 하는 메밀 막국수집을 가다.
가산 이효석선생의 단편소설 "메밀꽃 필무렵"으로 인하여
메밀꽃의 상징이 된 봉평.
사실 메밀은 병충해도 별로 없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서
오래 전부터 구황작물로 전국적으로 재배가 되고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초 고교시절, 광주 외곽에 있는 내고향에서도
늦여름이면 드넓은 메밀밭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밭에 휘적휘적 씨를 흩뿌렸다가 어린 순을 솎아 낼 때 쯤이면
살짝 데쳐서 된장에 묻혀낸 메밀무침이 어김없이 밥상을 점령했고,
시내에 있는 자췻집에서 반찬거리를 가지러 고향집에 갈라치면
한 밤중 고갯길 좌우에 바람결에 하얗게 휘날리는 메밀꽃으로 인하여
마치 귀신이나 본듯 소스라치곤 했었다.
8살무렵 일찍이 고향을 떠나 도시생활을 시작했다는 효석에게도
아마 달빛아래 바람따라 더욱 하얗게 휘날렸을 봉평의 넓은 메밀밭은
쉬이 갈수없는 고향과 고향에 남아있는 부모님에 대한 환영으로
깊게 각인되어 있었고,
서른한살에 발표했던 "메밀꽃필무렵"에
이러한 느낌이 짙게 베어 있었던게 아닌가 싶다.
이어 1938년, 39년 연달아 발표된 "장미병들다"나 "화분"의 작품세계를 보면
서구적 분위기나 동성애 등을 다루고 있어
탈 전원주의 또는 도시화는 피할 수 없는 지식인의 굴레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봉평 읍내도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점심 때가 훨씬 지난 시각인데도 메밀국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두바퀴를 돌아서야 간신히 식당 뒷편 도로에 차를 대다.
일행과 달리 국수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
밥한공기를 구걸하여 묵사발로 한끼를 해결하고
이내 이효석선생의 생가를 향해 출발하다.
<막국수집 뒤마당에서 처음 본 분홍딸기>
<흔히 보는 딸기의 꽃>
<강원도답게 한 걸음만 나서도 볼 수 있는 감자꽃이 한창이다.>
현지 지리를 잘 아는 작은 처남의 뒤를 무작정 따라가
민속촌처럼 새로 지어진듯한 초가집을 향해 진입.
먼저 생가에 가 있던 큰처남으로부터 거기가 아니라며 더 올라 오란다.
이효석선생의 생가터가 두 군데라는 말씀.
불행하게도 금방 차를 돌려 나오는 바람에 초가집의 생가사진은 올릴 수 가 없다.
다시 6번도로를 타고 오륙백미터쯤 무이리방면으로 진행하자
우측에 이효석 생가터라는 표지판이 보이다.
이건 더욱 아닌 것 같다.
대형 와가한옥으로 지어진 식당이 생가라고 표시된 건물을 내리 눌러
볼 것 없는 생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다.
낮으막한 야산 사이에 자리한 집의 위치로 보아
유년기에 집터와 함께 형성되었을 선생의 성격을 가늠해 보다.
쟁기와 지게 등 농기구들이 어지러히 걸려 있고
안내문대로라면 이곳에서 출생하여 13세까지 유년기를 보냈다는 것인데
선생은 8살때부터 대부분의 생활을 도시인으로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처음 들어갔던 생가터는 언제 살았던 곳이라는 말인가.
생가터는 상업화의 절정을 이루어
우측은 메밀꽃 필무렵이라는 식당, 좌측은 대형 고깃집 같은 식당에 포위되어 있다.
이삼십년 정도 된 소나무를 타르와 함께 붙여 벽체를 조성한 것이 이채롭다.
이미 고인이 된 이효석선생으로 인해 먹고 사는 식당 메밀꽃 필무렵
메밀묵을 쑤는데 사용되었음직한 큰 가마솥들을 입구에 층층이 쌓아 놓았다.
생가터 뒤에 수령 260~280년 되었다는 평창군 보호수 돌배나무
세월은 흘러 원 집주인은 바뀌었어도 나무는 여전히 제 자리에서 생가를 굽어보고 있다.
담장 밑에 핀 붓꽃
식당 메밀꽃 필무렵의 앞에는 온통 구절초 밭이다.
7월에야 파종하여 하얗게 핀 메밀꽃을 못 보는 대신
흐드러지게 핀 하얀 구절초로 메밀밭을 상상해 보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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