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늘 미지의 장소나 사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희망으로 시작된다.
특히나 어려운 시간을 쪼개 짬을 내어 다니러 가는 길이다보니
주마간산격으로 쫓기우듯 일별하고 올 수 밖에 없으나
요모조모 뜯어 보고 만져보고 짜 맞추어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돌아서는 길이 늘 허무하다.
어쩌면 마음대로 그리고 상상했던 집착으로 인해
돌아보고 오는 길은 늘 빈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다시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여행지를 찾아 떠나는 것일게다.
광양 홍쌍리댁 매실농원을 둘러 보고는
뉘엇뉘엇 지는 해를 뒤로 하고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 하동 최참판댁을 찾아 나서다.
요즈음이야 지자체마다 될성부른 드라마의 세트장을 관광지로 조성하고자
앞다투어 제공하는 터이지만
KBS 드라마 토지가 방영되던 1970년대에는 물론
SBS가 방영하던 2004년도에도
지자체 공무원들이 사업에는 눈이 뜨지 않았던터라
옴막 다 제작비로 세트장이 만들어졌을터
세트장의 규모로 보아도 대작인 드라마 토지의 제작비를 가늠하겠다.
박경리선생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도착하여
인당 1,000원짜리 입장권을 끈어 세트장 어귀에 다다르니
지붕에 무수히 꽂혀 있는 솟대가 여행자를 반긴다.
서희와 길상의 캐릭터를 내세운 최참판댁 안내도
최참판댁의 아흔아홉칸 와가를 중심으로 그의 전답을 붙여 먹는
부치기(소작농, 식객)들의 초가집을 배치해 놓은 근대의 전형적인 농촌 취락구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취락구조를 통해 대하소설 토지의 시대적 배경인 189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의
농경지문화를 바탕으로한 우리네 삶의 단면은 잘 볼 수 있겠다.
최참판댁의 세트장은 토지 뿐만아니라
일지매 등 많은 영화 촬영장으로도 제공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역시 주세트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토지"였으니
토지 촬영장 하동 최참판댁으로 알려졌단다.
솟을대문 모양의 이정표나 이정표에 쓰인 서체가 분위기와 썩 잘 어울린다.
불과 40여년전 1960년대 후반까지도 우리나라 농촌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이랬었다.
새마을운동으로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주택개량사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볏짚을 엮어 마람과 이엉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 모두 모여 오래된 초가지붕을 바꾸곤 했었다.
그래서 시골은 길쌈이나 농사나 지붕바꾸기까지도
온동네 사람 모두 모여 잔칫날처럼 어우러지는 일들이 많았었다.
토방에 놓인 미투리(짚신)와 검정고무신은
한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과도기였음을 말해 준다.
마을의 골목 담장은 대부분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돌을 쌓아서 만들고
집과 집의 경계는 수숫깡이나 싸릿대로 울타리를 만들어 세우고
울타리 사이의 틈새로 서로 음식은 주고 받았음은 물론
이웃간에 인사를 트는데 전혀 막힘이 없었다.
싸릿대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낮으막한 싸릿문이 정겹다.
싸릿문을 열고 들면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었던 소를 돌보는 외양간이 가장 먼저 눈에 든다.
워낭을 달지 않은 진짜 소가 여물을 먹고 있었다.
낮은 돌담 너머로 서서방네 장짓문을 바라보며 냉이국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듯 가깝다.
처마에는 보통 내년 농사의 씨로 쓸 수수나 조 이삭을 매달아 놓았고
처마가 맞닿은 이웃간의 담장은 형식적으로 돌무더기를 쌓은 정도일만큼
막힘이 없다.
규모가 작은 빈농의 농가는 쪽문 방한칸에 정지(부엌)문 하나 달랑이었으나
헛청을 따로 두고 지붕을 보수할 짚단을 쌓아 둘 정도면 제법 큰 소작농 축에 들었다.
남도의 돌담장 틈새나 위는 어김없이 마삭줄 덩굴이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봉창문을 둘 정도의 농가 주택이면 곡식을 따로 둘 광이 있는 중농이었다.
처마밑에 걸린 가을걷이용 덕석이 정겹다.
초가집의 벽체는 대체로 볏짚과 황토를 짓이겨 만든 흙벽돌을 차곡차곡 쌓고
외벽을 황토로 바르거나
기둥이나 중간 보 사이에 수숫대를 세워 넣고
황토를 짓이겨 붙여 벽체를 만들었다.
기와집을 지닐 정도면 벌써 방 여러 칸에 곡식을 두는 곡간을 따로 두었고
조금 더 나은 사람은 대문간에 식객이나 청지기를 묶게 할 사랑채나 행랑채를 따로 두었다.
최참판댁은 평사리 지방 토호라 대문부터가 하층민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기개가 있다.
초가에 사는 부치기들과는 달리 덕석을 올려 놓는 시렁이나
수수나 조를 걸어 놓는 횟대조차
다르다.
안채에 붙은 부엌과 찬방의 크기로 살림살이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고
주로 안주인이 기거하던 별당채로 들면 아담하고 작은 연못과 전각
그리고 잘 꾸며진 정원을 볼 수 있다.
바깥 주인이 주로 기거하던 바깥채와 사랑채로 통하는 문
사랑채의 전각에 올라 서면 부치기들이 부쳐 먹는 평사리 전답들이 한눈에 든다.
이 멀리 떨어진 바깥채에서 안채를 향해 이리 오너라를 불렀을 것이니
종복이 늘 문간에 대기하지 않았더면 어찌 소통하였을꼬.
각종 농사도구와 배짜는 도구들을 걸어 놓았는데
최참판은 노비들을 위해 쌀뒤주조차 광 밖에 놓았었을까 ?
우리의 한옥은 하늘을 향한 버선코와 같은 추녀의 추임새와
단정한 곡선의 처마 그리고
돌과 황토를 적절히 배합하여 쌓은 담장이 한데 얼려 단아하기 그지 없다.
성냥갑처럼 똑 같은 요즈음의 아파트에 비할손가 !
흔적만 남은 저자거리에는 부산함 대신 말 없는 말구유와 마차만 역사의 뒤안처럼 외롭다.
돌아 나오는 길은 벌써 어둑 어둑해지고
저문 길을 돌아나오는 것이 조감도(스카이뷰)를 보는 듯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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