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나는 봉선화
어린시절의 추억이 가득합니다.
일종의 여자들만의 전유물이기도 하지만
어린 남동생을 귀여워하는 누이들은
어김없이 사내아이 새끼손가락에도 봉숭아 물을 들여주곤 했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 봉선화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조선 중기 서화가 강희안의 <화목구품>에 구품으로 기술되어 있고
숙종조의 실학자 호만선의 <산림경제>에도 나타난다고 하지만
삼국시대라고 그 연원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나 봅니다.
<봉선화>
쌍떡잎식물 무환자나무목 봉선화과의 한해살이풀
학 명 : Impatiens balsamina L.
원산지 :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
분포지 : 전세계에 재배
서식지 : 햇빛드는 약간 습한 곳
이 명 : 봉숭아, 금봉화, 염지갑화
꽃 말 : 나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효 용 : 관상용. 활혈, 진통, 소종의 효능이 있어서 민간에서는 습관성 관절통, 월경통, 임파선염, 사교상 치료에 쓴다.
어린시절 시골 집집마다 울타리밑이나 장광 옆에는
봉선화 몇그루씩 심어져 있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민족의 치욕의 역사와 함께 기리 기억될
"봉선화"가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홍난파 작곡 김형준 작사의 단순한 이 노래는
일제 치하에서 반일노래라고 금지곡이 되기도 했었다네요.
애절하고 처량하기만 한 노래가 어떻게 항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인되었을까?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는 것이
손가락에 피를 묻히는 여자광복군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봉숭아가 정신대에 끌려가 이 땅의 누이를 상징한는 것이라고도 하고
톡 터져 여기저기 씨앗을 흩뿌려려서 다음해면 어김없이 싹을 티우는 것이
일제가 지려밟아도 또다시 일어나는 독립정신을 의미한다고도 하고...
하지만 우리 또래의 눈에는
노랫말이나 음율이 너무나도 처량맞은 것이라
사춘기 이후에는 이 노래를 불러본적이 없는 것 같네요.
아니 마지막으로 불렀던 곳이 76년도 하사관학교 침투훈련교장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숨이 멋을만큼 힘들게 참호 속으로 '우로 굴러, 좌로 굴러'
그리고 이내 기합으로 '통닥구이'와 '쪼그려 뛰기'르 시키고 난 후에는
악마구리 같은 조교들은 '어머님 은혜'와 이어서 '봉선화'를 부르게 했었지요.
총성과 함성이 난무하던 훈련장은 이내 울음바다로 바뀌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내겐 봉선화는 억압적인 군대에 대한 저항의 노래였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