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교 일원의 야경>

베트남 다낭여행 셋째날 오전 일정

오행산 동굴 관람과 빙쿠라다이의 바구니배 타기 체험을 한 후

현지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벤에 탑승 호이안 도자기마을에 들렀습니다.

발물레를 돌리는 이벤트 외 특별한 관심거리가 없어서

도자기로 만든 포대화상 1점을 사고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배를 타고 투본강을 거슬러 마지막 행선지 호이안 올드타운으로 이동하는 중

투본강 수변에 보이는 주황색 기와에 하얀 벽의 2층 집들이

유럽풍처럼 아름답습니다.

호이안이라는 지명은 한자로는 모일 회(會) 평안 안(安)자 회안의 베트남식 발음입니다.

평화적인 모임지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만큼

15세기부터 19세기에 유럽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동남아의 주요한 무역항으로 간주되어

서구에는 Fai-Fo 또는 Faifoo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습니다.

베트남어로 Hoi An Pho(호이안마을)로 불렀던 것을

잘못들은 무역상들이 그리 불러서 Fai-Fo로 알려진 것으로 생각된답니다.

투본강을 따라 온 배에서 내리면

시원하게 자란 야자수가 이국적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배에서 내린 많은 관광객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호이안 관광에 나섭니다.

이렇게 일행들과 한데 어울려 걷기도 하고

한사람씩 시클로를 타고 돌아보기도 합니다.

호이안은 베트남 꽝남(Quang Nam)지방에 있는 인구 19만의 작은 도시입니다.

호이안의 역사를 찾아보면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 베트남 중부지역을 지배하던 참파왕국(Champa)의 참족이

호이안을 통한 향신료의 전략적 거래 조절로 엄청난 부를 이루면서

이 무역 열풍을 따라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몰려온

중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인도인등이

자연스럽게 해변도시 Hai Pho(Hoi An)에 정착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실상 참파왕국의 상업적 수도였던 호이안에

다양한 나라와 인종이 뒤섞이면서

베트남 내에 독특한 건축과 주거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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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건물

독특한 건물들 

독특한 건물들 

독특한 건물들 


1535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안토니오 데 파리아(Antonio de Faria)가

다낭에서 내려와 호이안 항구마을에 무역중심센터를 세웠는데

응우웬왕조의 응우웬 호앙황제는 1595년 호이안을 무역항으로 지정하여

지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결과 16세기 호이안은 유럽과 중국, 인도, 일본 사이에서

도자기산업에 있어서 강력한 무역거점으로 간주되었었습니다.

특히 일본과 중국 상인들은 그들만의 정착촌을 건설하기도 했지요.

<안호이교(An Hoi Bridge)의 수변 풍경>

그러나 18세기 말 무역거래에 반대하는 떠이선(Tay Son)의 반란으로 약해진

응우웬왕조의 몰락으로 호이안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자롱황제에 이르러 인근 다낭에 프랑스의 무역독점권을 부여하면서

마침내 호이안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지요.

<베트남 전통 웨딩촬영 모습>

호이안시대의 마감과 함께 내원교를 중심으로

서쪽편에 건설되었던 일본인 정착촌은 대부분 옛 모습이 사라졌지만

중국인 정착촌은 옛 건물 그대로 보존 유지되어 왔습니다.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무역항 시대의 유물들이

이례적으로 잘 보존 되어 있다는 점을 높이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이 호이안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 베트남에 왔던 폴란드인 문화운동가 카지크(KAZIMIERZ KWIATKOWSKY 1944~1997)가

호이안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고를 기리는 기림비도 호이안에 세워져 있습니다.

<카지크 기림비>

호이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이드가 소개하는 곳은

내원교와, 광조회관, 풍홍의 집 등 몇 군데 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만의 느낌으로 고풍스러운 거리를 걸으며 느끼면 되는데

그러기에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흠입니다.

베트남 토착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호이안은 제국주의시대 수탈의 역사적 흔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요즈음 세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목포의 적산가옥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보존해야 할지 없애야 할지는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 적산가옥의 다다미방에서 생활했던 제 기억으로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다다미방은 제 생리에는 맞지 않은 것이었지만...

<내원교>

내원교(來遠橋, Japanese Bridge, Chua cau, Cau Lai Vien)는

1593년 일본 상인들이 중국 상인 정착촌과 연결하기 위해 세운 다리랍니다.

길이가 얼마되지 않은 일본풍의 배부른다리로

상인들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뜻으로 다리 위에 다리와 연결된 꺼우사원(다리사원)을 세웠는데

크기나 규모와 관계없이 그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러한 흔적들이 진취적인 해양국가의 산물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훨씬 이전부터 전 세계에 그들의 문화와 문물을 전파했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행짜가 졸열하고 밉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아 대단한 족속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네요.

<내원교 원경>

내원교를 지나면 일본인 정착촌이었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대부분 현대식건물의 상가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일본교(日本橋)라 쓰여진 등이 내걸린 풍홍의 집 2층 베란다에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한 컷 담았습니다.

일본인 정착촌거리

일본교 인근 거리

일본 정착촌 거리


한국에도 그 브랜드가 수입되었다는 콩카페에도 가봅니다.

콩카페 내부 모습

 콩카페 내부

콩카페 커피


상인 턴키의 집

여가사


19세기 중국 광동지역의 상인들이 호이안에 정착하여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 중 하나인 관운장(關羽)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그들의 안위를 기원하고

회합장소로 썼다는 광조회관(廣肇會館)도 들러보고

또 다른 중국식 건물, 아마도 복건성쪽 상인들의 회합장소로 보이는

복건회관(福建會館)도 담아 봅니다.

광조회관보다 내부에 볼거리가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입장권을 사지 않아서 밖에서만 보고 돌아섭니다.

 복건회관

복건회관 내부


호이안시장입니다.

길거리 풍경들

미술품 가게

미술품 가게


길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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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처음 도착했을 땐 그리 많지 않았던 관광객들이 시간이 갈수록 늘어서

사람을 피해 사진을 담는 것은 물론

교행하기조차 힘들어져서 투본강변쪽으로 나왔습니다.

강변풍경을 잡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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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본강

투본강

안호이교 


더위 속에 걷는 것에 지쳐갈 무렵

간단하게 발마사지를 받으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립니다.

야시장쪽에서 안호이교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담았습니다.(갤노트9)

삼각대가 없어서 노출을 최대한 개방한 카메라로 담은 야경들입니다.





야시장 풍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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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

야시장

야시장


길거리에 넘쳐나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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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 관광객

야시장 관광객

야시장 관광객


그 사이 강변에는 어둠이 내리고

야간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과 구시가지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화려하게 채워졌네요.

우리 일행은 식당에 예약된 시간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철수하기로 합니다.






강변에 세워진 등들을 폰카로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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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등

북등

기린등

등트리

동물등

오래 머무르지 못함이 아쉽고


삼각대를 가져가지 못했음이 아쉽고

자유여행처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없었음이 아쉽고

또 하루의 여정이 끝났음이 아쉬운

호이안의 반나절 일정이었습니다.






다낭여행 셋째날 두번째 찾은 곳은 호이안입니다.

다낭을 찾는 관광객 대부분이 그렇듯

바구니배를 타보려 합니다.

베트남어로는 통차이(Thung Chai)라고 부르는 Basket Boat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시기에 베트남의 모든 배에 선세(船稅)를 부과하자

세금을 낼만한 여유가 없는 가난한 어부들이 조세 회피를 위하여 만들어낸 배랍니다.

그들은 세무당국자에게 이것이 대바구니이지 무슨 배냐고 항변해서

감당할 수 없었던 세금 부과를 피했다네요.

좁은 수로에 담양에서 만들었음직한 커다란 대광주리가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런 원형배는 영국 웨일스지방과 아일랜드

그리고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티벳, 이라크 등지에서 사용되던

Coracle(원형배)과 유사한 것이지요.

다만 베트남의 것은 현지에서 구하기 쉬운 소재인 대나무를 교차하여 엮고

밑바닥과 안쪽을 방수수지로 코팅한 것이지요.

주기적으로 코코넛오일과 타르, 유리섬유 등을 표면에 발라주면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는 무동력의 탈 것인 셈입니다.

지금은 관광용으로 주로 쓰고 있지만

미케비치 앞바다에서는 지금도 바구니배를 이용해 어업활동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위태롭게 보이는 파도 속 바구니배 고기잡이>

바구니배를 타러 가는 선착장으로 가는 간이 다리.

황금빛 용머리로 장식해두었습니다.

곳곳에 새겨지거나 조각된 용은

베트남과 뗄 수 없는 신령스러운 존재인가 봅니다.

다낭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사막의 장미라 부르는 아데니움도

화분 속에서 활짝 피었습니다.

곳곳이 바구니배를 타는 곳이지만

우리는 레히엔(Le Hien)이라는 업체를 찾았습니다.

베트남어사전을 찾아밨지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네요.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젊은 청년들이 뱃사공으로 왔습니다.

앞뒤가 없어서 균형 잡는 걸 걱정했는 데 전혀 문제 없이 무사히 탑승했습니다.

여자 혼자 타는 경우에는 할머니 뱃사공도 있던데

아마도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두 사람씩이나 타니 그렇게 배치하나 봅니다.

앞뒤 구분이 없음에도 배는 미끄러지듯 앞으로 쑥쑥 나아갑니다.

이렇게 어린 코코넛나무 숲을 끼고 수로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체험은 끝납니다.

수면임에도 너무 더워서 코코넛나무 그늘에 잠시 쉬기도 합니다.

빈쿠라다이(Vinh Cura Dai) 내해 쪽이라 그런지

수면은 거울처럼 잔잔합니다.

이 곳에서도 초크 그물 같은 것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한국 관광객이 얼마나 많이 찾는지

바구니에 앰프를 실어놓고 "뿐이고"라는 한국 가요를 신나게 부르는 청년이 있네요.

"돈 없어도 당신 뿐이고 돈 많아도 당신 뿐이고

이 넓은 세상 어느 곳에 있어도 내 사랑은 당신 뿐이다 ~"

기분이 좋아진 친구가 팁을 선뜻 내줍니다.

정말 돈 많아도 당신 뿐일까요? ㅋㅎ

한바탕 노래를 듣고 돌아 보니

수면에 길게 드리운 흰구름까지

모든 것이 정지된듯

한가롭게만 보이는 수면입니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배구니배를 빠른 속도로 360도 회전 시키는 묘기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고요

투망질 시범을 보여주고

돈을 받고 체험할 수 있게 하는 투망체험장까지

호이안의 바구니배 체험장은 복합적인 거대한 수상 사업장입니다.

바구니배 체험 관광객들

Vinh Cura Dai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더위로 인해 땀방울이 흐르기 시작할 즈음

배는 출발했던 곳을 향해 되돌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여유로운 힐링여행이지만

그들에게는 또다른 삶의 현장입니다.

비록 일과 여행이라는 서로 다른 목적이 바구니배에 함께 실렸지만

그 속에서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행복해지는 항해(航海)이기를 바래 봅니다.

바구니배의 이동경로를 맵에 그려 봅니다.


다낭여행 셋째날 찾은 곳은 무엉탄럭셔리호텔 가까이 있는

오행산(베트남어 : Ngu Hanh Son, 한자 : 五行山, 영어 : Marble Mountain)입니다.

대리석과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다섯개의 크고 작은 높지 않은 언덕으로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죽어라 도망가지만

석가여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고

다섯손가락을 지구의 끝에 있는 기둥으로 생각했다가

결국 석가여래의 다섯손가락이 변한 오행산에 갇히고 말았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사실 동양철학과 도교의 주요 핵심 축인 오행사상은

화, 수, 목, 금, 토의 다섯가지 요소가

음과 양, 그리고 상생상극의 원리로 조화와 통일을 이룬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숙소 29층에서 바라본 아침의 오행산은

멀리서 보기에도 무슨 조각작품처럼 보입니다.

오행산으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정상에 올라 주변 경관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28-300mm 렌즈를 챙겼으나

우리 일행을 끌고 다닌 여행사의 말도 안되는 라텍스매장으로 방문스케줄때문에

실망스러운 암푸동굴만 보고 돌아나올 수 밖에 없었네요.

<투이산 암푸동굴 입구>

크고 작은 언덕 규모인 다섯개의 산은 모두 동굴 입구와 많은 터널들이 있지만

 그 중 관광객들의 입산이 가능한 곳은 물(水)을 상징하는 투이산(Thuy Son)뿐입니다.

투이산 정상의 사찰들과 주변 경관을 보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156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전체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2시간여 정도가 소요된다네요.

그래 날도 덥고 하니 암푸동굴만 보고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겠다 합니다.

투이산의 암푸동굴(Dong Am Phu : Am Phu Cave)은 19세기에 발견되었는데

민망왕이 베트남어로 '지옥'을 뜻하는 'Am Phu'라 이름지었답니다.

<투이산 정상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투이산 지하에 있는 거대한 석회암동굴인 암푸동굴은

불가의 지옥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죄를 고백하고 처벌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당에 이른다는 스토리를 담았습니다

2006년도에 지역예술가들이 참여하여

동굴 내 천연 암석과, 암흑터널, 종유석 등에 더하여

공포스러운 느낌을 강화시켜 주는 형상과 제단 그리고 불상 등을 설치함으로써

스토리텔링을 주제로 하는 관광상품으로 다시 개방한 동굴입니다.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으로 만들어진 천연동굴의 모습은 볼 수 없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형상들을 어두운 천연동굴에서 볼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유원지에서 만나는 '귀신의 동굴' 같은 느낌을 준다고나 할까요?

음양교를 건너서 동굴입구로 향합니다.

내부에서 바라본 입구

동굴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천장이 높습니다.

더운 날씨에도 동굴 안은 선선한 기운이 감돕니다.

천번째 만나는 넓은 광장입니다.

영령묘(英靈墓)라 쓰여진 탑이 있네요.

광장에서 도인의 복장을 한 석상을 지나 약간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면

또다시 넓은 광장이 드러납니다.

두번째 광장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만난 괴이한 형상들입니다.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영혼들이네요.

조악한 동상들이 괴기스럽기도 하지만

공포를 줄만큼은 아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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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속 영혼들

악어에 물린 영혼

동굴속 귀신두

벌받는 영혼

벌받는 영혼

동굴 속의 통로는 때로는 위로 오르기도 하고

때로는 땅 속으로 더 깊이 내려가기도 합니다.

음산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의도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너무 어두워서 사진으로 담기가 무척 힘듭니다.

열명의 심판관이 죄의 유무를 밝히는 시왕의 법정?

정면에 놓인 동그란 구를 통해 자신의 일생을 볼 수 있다 합니다.

다시 동굴입니다.

흘러내린 듯한 석회암이 만든 천정

기이한 모양으로 깎인 천연동굴

천정에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구멍을 통해 쏟아지는 빛이 천지창조 같은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높이를 가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해 보이고

녹아내린 석회암의 잔재는

마치 주름진 암석커튼을 대충 묶어 놓은 것 같은 느낌입니다.

마음 심(心)자를 새긴 조형물을 두 손으로 떠 받든

Sam Hoi Dai

어둠 속에 조명을 받는 징악적 조형물.

동굴 속 바위 형태에 맞추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광장입니다.

벽면에 판관전(判官殿)이라 새겨져 있고

좌상을 한 염라대왕(?) 앞에 죄의 무게를 재는 천칭이 걸려 있습니다.

좌대에는 음양오행설을 상징하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곳은 극락보전일까요?

법당처럼 삼신불이 서있습니다.

작은 조각으로 빚여놓은 불상들이 가득합니다.

어둠 속에서 환하게 뚫린 천장을 향해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또다른 출입구인 천당에 오르는 길입니다.

어둠 속에서 미끌어질 위험도 있고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천당에 오른는 길로 나가는 걸 포기합니다.

왔던 길로 다시 동굴 밖으로 나가는 길

음양교를 지나가는데 구원의 손길을 들어 올린 영령들

물속에 솟아 오른 손들만보이는 것이

세상에는 여전히 구원을 바라는 손들이 있다는 것일까요?

암푸동굴은 동굴 진출입시 발밑을 특별히 조심해야 할 곳입니다.

좁고 어둡고 미끄러운 계단에서 미끄러져서 다칠 위험도 있어 보입니다.

만일 단체관광객이라면 가이드에게 암푸동굴보다는

투이산 정상의 사찰을 보고 싶다고 코스변경을 요구하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후에황궁을 나와 다시 찾은 곳은

황성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캄케산(HIEU SON : 孝山) 흐엉(香)강변에 자리잡은

응우옌왕조의 2대조 민망(Minh Mang : 明命)황제의 릉입니다.

민망황제는 자롱황제의 넷째 아들로 본명은 응우옌 푹 담(Nguyen Phuc Dam : 阮福膽)이지요.

나중에 응우옌푹끼에우(Nguyen Phuc Kieu : 阮福皎)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통칭으로 연호인 명명제(明命帝 : 베트남어 민망)로 부릅니다.

1791년 5월 25일 태어나서 29세인 1820년 2월 4일 즉위 후

1841년 1월 20일 사망할 때까지 21년간 베트남을 통치했습니다.

부친인 자롱황제보다 더 강경한 보수주의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기독교를 박해하고 중국식 복색을 장려하기도 할 정도로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에 대항한 자주독립의 강력한 군주로 평가 받고 있지요.

식민지 확장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과 침략을 받았던 시기라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조선말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국에서도 황후와 후궁 등 43명의 부인으로부터 143명의 자녀를 두었다니

지나친 방사로 50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한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ㅋㅎ 그런 민망왕의 이야기를 일반 관광객이 무덤에서 듣기에는 민망(憫惘)하지요.

<신월호(新月湖)반의 민망왕릉 전경>

민망황제는 재위 초기에 자신의 무덤 축조에 착수 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완성되지 않아서 그의 아들인 뜨득(Thieu Tri)황제가 완공했습니다.

무려 만명의 인부와 석공, 목공 등 장인이 동원된 당시로는 대역사였지요.

면적만도 15ha(약 150,000㎡)에 무덤인 현궁(HUYEN CUNG)외에도

비각과 황제의 옷을 보관하는 건물, 추모를 위한 건물 등 사후에 대비한 건물은 물론

생전에는 휴양시설로 쓸 수 있도록

독서를 위한 쭈이뜨짜이(Truy Tu Trai : 追思齋),

자연관찰을 위한 꽌란서(Quan Lan So : 觀蘭所),

사슴을 키우는 뚜안록히엔(Tuan Loc Hien : 馴鹿軒),

왕과 후궁들의 휴식처 린프엉깍(Linh Phuong Cac : 玲方閣),

낚시를 위한 정자 디에우응우딘(Dieu Ngu Dinh : 釣娛停),

신선한 공기를 즐기기 위한 응엔르엉관(Nghenh Luong Quan : 迎凉館),

휴식을 위한 호아이따(Hu Hoai Ta) 등을 호수변에 세우는 등

40여개의 건축구조물을 능역(陵域)내에 구축했지요.

민망황제의 능은 바로 앞에 있는 흐엉강의 물을 끌어와

휴양과 제례를 위한 부속건물을 둘러 싼 쫑민호(Ho Trung Minh : 澄明湖)와

초승달 모양으로 무덤을 둘러싼 떤누엣호(Ho Tan Nguyet : 新月湖)를 배치하여

하늘에서 보면 전체가 자궁 모양이 되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자궁의 중심부에 무덤을 두고 대홍문으로부터 중앙을 관통하여 직선으로 연결되도록 함으로써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로 삼고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 천국에서 부활을 꿈꾸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지요.

<민망황릉 출입구>

능원 입구 좌홍문에 이르는 길

따홍문(Ta Hong Mon : 左紅門)

주차장에서 내린 관람객은 사각의 보도블럭이 깔린 숲속 길 500여미터를 걸어야 합니다.

좌홍문에 이르기까지 녹음이 짙은 고요한 숲속길을

이름모를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기분은

민망왕이 꿈꾸었던 휴양소에 가는 기분입니다.

진입공간과 재실.재향공간, 전이공간, 능침공간 등 단촐하게 꾸며진

조선왕실의 왕릉과 비교해 보면 전체 구조면에서 훨씬 복잡하고 화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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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민호

수원 유입구

쫑민호

중국 왕실건축의 영향을 받은 조선왕궁과 마찬가지로

주출입문은 중앙에 배치한 삼문입니다.

황제의 시신이 반입된 후로 가운데 문은 한번도 열린 적이 없다는

다이홍문(Dai Hong Mon : 大紅門)을 중앙에 두고

문무백관과 황실 일족은 그 문의 좌우로 통과하게 했고

대홍문과 멀리 떨어진 좌우측에

좁은 양개문(兩開門)인 따홍문(Ta Hong Mon : 左紅門)과

흐우홍문(Huu Hong Mon : 右紅門)을 배치하여

일반 궁인들이 드나들도록 만들었습니다.

주출입구인 대홍문에서 비각에 이르는 앞마당은

황토로 구운 사각보도블럭을 깔았고

좌우에 코끼리와 말 그리고 문무인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석상을 세운 것은 중국 고대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왕실 무덤과 비슷하군요.

<바이딘(BI DINH : 碑閣)  앞마당의 대홍문과 석물들>

첫번째 만나는 건물은 아들 뜨득황제가 아버지의 공덕을 기려세운 공덕비가 있는

비각, 바이딘(BI DINH)입니다.

<바이딘 : 碑閣>

바닥에서 단차를 두어 2단 피라미드형으로 쌓아 올린 장방형의 기단 위에

높은 길이의 송덕비를 갈무리 할 수 있도록

지붕 중앙을 2층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홍문(大紅門 : DAI HONG MON) 

문인석과 비각

비각의 후면 북동향에서 담은 비각 전경입니다.

전후면 계단의 난간석은 꿈틀거리는 용모양으로 장식했습니다.

<비각>

비각의 정면과 내부 모습입니다.

내부는 중국황실을 모방하여 붉은색으로 단청을 했네요.

비문은 마모가 되었는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고요.

바이딘(BI DINH : 碑閣) 정면 사진

비각 내부의 송덕비 

비각을 관통하여 후면으로 내려서면

약간의 단차만 두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네 블럭의 넓은 마당 끝에

이층으로 쌓아 올린 히엔득문(Hien Duc Mon : 顯德門)이 보입니다.

장방형의 마당과 좌우 대칭적으로 만들어진 호수

그리고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직선으로 뻗은 보도.

대칭적이며 균형적인 감각과 엄숙함이 느껴지는 구도입니다.

이 넓은 마당은 제례마당(San Chau)으로 사용됩니다.

제례마당 북쪽 끝에 서있는 중국식 문을 모방한 2층 삼문.

현덕문입니다.

왕은 덕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에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기와를 올렸고

용마루 끝과 추녀 끝에 섬세하게 만든 용장식을 사방으로 달았습니다.

<히엔득문(HIEN DUC MON : 顯德門)>

닫혀있는 중앙의 문을 피해 좌우문으로 들어 가면

정면에 민망황제와 황후 타띠엔난(Ta Thien Nhan)을 숭배하는 사당인

디엔숭언(Dien Sung An : 崇恩殿?)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부속재실인 따뚱투(Ta Tung Tu : 左從寺), 흐우뚱투(Huu Tung Tu : 右從寺)가

단층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숭은전과 TA TUNG TU(左從寺?)>

디엔숭언(DIEN SUNG AN : 崇恩殿) 내부를 지나

묘역으로 향합니다.

문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빛살이 신비롭습니다.

디엔숭언 뒷마당 좌우에 황족들이 머무를 수 있는 건물인

따뚱비엔(Ta Tung Vien : 左從院), 흐우뚱비엔(Huu Tung Vien : 右從院)이 있고

정면에 4단으로 쌓아 올린 붉은색으로 채식된

호앙짝문(Hoang Trach Mon : 皇宅門?)이 서있습니다.

<HOANG TRACH MON>

난간석이 용으로 장식된 계단 위에 서면

쫑민호를 건너 명루와 연결시켜주는 짧은 다리 꺼우쭝따오(Cau Trung Dao : 中道橋)가

잘 빚은 것처럼 단정하고 곱게 뻗어 있습니다.

<민러우(Minh Lau : 明樓) 가는 길>

중도교 입구에서 명루를 바라보니

이름 그대로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게

좌우에 잘 자란 송림이 우거져 있네요.

<명루 가는 중도교>

2층 구조로 정사각형의 사각지붕인 명루(明樓)는

땅과 물과 하늘을 상징하는 3단의 사각 테라스 위에

사방이 열린 깔끔한 모습으로 앉혀져 있습니다.

내부는 붉은 단청으로 칠해져 있고

사방의 문을 열어 놓으면

황제가 청량한 기운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로 설계되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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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H LAU(明樓) 

민러우(명루) 내부

민러우(명루) 후측방 전경

명루 후원에 조성된 정원(庭園)은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적으로 설계되었고

황제의 장수를 상징하는 글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명루 북쪽 좌우 끝단 외곽 숲속에는

카이딘 왕릉에서 보았듯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높은 오벨리스크도 세워져 있군요.

<명루 동북방에서 본 명루와 숲속의 오벨리스크 그리고 정원>

명루 밖으로 내려서면 드디어 저 멀리 호수 건너편에

좌우로 길게 누워있는 동산 같은 민망황제의 무덤이 보입니다.

밖에서 보면 봉분이 전혀 보이지 않고 동산처럼 보여서

인위적이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것처럼 보이는 우리나라의 왕릉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릅니다.

마치 수변공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네요.

<명루 후원(後園)>

여러 개의 문을 지나고도 또 다시 패루 또는 패방이라 부르는

문짝없는 두 개의 문과 다리를 통과해야 황제의 무덤

후옌궁(Huyen Cung)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앞쪽 패루에는 정직하고 분명하다는 뜻으로 주자어류에 나와 있는 광명정대를

정대광명(正大光明)으로 순서를 바꾸어 써놓았습니다.

초승달 모양의 떤누엣호(新月湖)를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는 다리

꺼우통민찐쯕(Cau Thong Minh Chinh Truc : 松明正直橋?)을 건너면

학생기록부에서 보았음직한 총명정직(聰明正直)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패루 뒤에

시커멓게 빛바랜 시멘트 담장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봉분이 송림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황제의 무덤인 후엔궁입니다.

황제의 무덤은 높이 3m, 둘레 285m의 담장과 굳게 닫힌 청동문 뒤

지하에 있습니다.

1941년 황제의 시신을 묘지로 반입했던 지하통로는 영구히 봉쇄되었고

굳게 닫힌 청동문은 1년에 단 한 번

제삿날만 열립니다.

해는 벌써 묘역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만큼 기울었네요.

다낭으로 돌아 갈 시간에 쫓기듯 돌아나오는 길

칼로 자른듯 열맞추어 서있는 신월호 위의 다리와 명루를 담아 봅니다.

좌우에 오벨리스크 키만큼 소나무가 훌쩍 자라서

처음에 조성했을 때와는 달리 보이겠지만

나무들이 관목처럼 낮았을 것이라 상상하며

묘역을 참 예술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꺼우통민찐쯕(CAU THONG MINH CHINH TRUC:松明正直橋)>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무덤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이는 비단잉어가

마치 무슨 전조증상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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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누잇호(新月湖) 

HO TAN NGUYET(신월호)

비단잉어 

우리나라에서는 유택을 정할 때

물이 많지 않은 땅을 선택하는데

일부러 인공호수를 만든 베트남왕의 생각은

무덤을 무덤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역사상 중국의 지배를 네 차례나 받았고

수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어쩌면 무덤을 무덤처럼 보이지 않게 할 의도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도굴이나 훼손으로부터 자신의 유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좌측 오벨리스크>

호반에 지었다는 부속건물들은 눈에 띠지 않지만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슴과 소가 보입니다.

쫑민호(澄明湖)와 부속건물 터

꺼우쭝따오(CAU TRUNG DAO:中道橋)

묘역을 벗어나 입구의 푸른 숲을 보니

이곳이 묘역인지 공원인지 헛갈릴 정도 입니다.

같은 유교문화권이어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카이딘왕릉이나 민망왕릉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내세관은 우리와는 또다른 모습입니다.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묘역이 관광상품이라는 생각에 시쿤둥했었지만

와서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능역 안내도 

위성뷰로 본 능역 



후에 시내 씨클로관광 후

전동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후에황궁입니다.

다낭 시내 다낭미술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띠엔하이 시타델에서

이미 베트남의 축성방식 일부를 보았지만

이곳 후에황성에서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후에황성(Hoang thanh Hue, Hue Citadel, Imperial City)은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을 지배했던 응우엔왕조의 궁궐로서

오늘날 베트남 최고의 문화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93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1947년의 인도차이나전쟁과 1968년 베트남전쟁으로

10여채를 남기고 소멸되어 버린

70여채의 전각 등 황성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2008년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는 ODA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유산디지털복원기술로 후에황성을 3D 디지털로 복원하여 제공하기도 했었지요.

<후에황성 주출입문 오문(Ngo Mon : 午門)>

프랑스 신부의 도움으로 1802년 서산조를 멸망시킨 자롱제(Vua Gia Long : 嘉隆帝)가

통킹을 중심으로 북부를 지배하던 껄끄러운 찐가문을 피해

후에를 수도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1804년 후에황성의 축성을 시작했습니다.

자롱제는 본명이 응우엔 푹 안(阮福映 1762~1820)으로 황제에 즉위한 후

연호를 가륭(嘉隆)으로 정하였고

1804년 청나라에 의해 안남국(安南國)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건국에 성공하여 프랑스인들에게는 우호적이었지만

프랑스의 통상요구를 일관되게 거부하여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었지요.

<여러 각도로 담은 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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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서 담은 오문

해자와 오문

오문

후에황궁은 중국 자금성을 본 따 지은 궁궐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동서로 620m, 남북으로 604m 총 둘레 약 2.5km의 내성을

두께 10.4m, 높이 6.5m의 벽돌 조적으로 프랑스 보방식 성채를 쌓았고

성루에는 400문의 포를 거치할 수 있는 24개의 포대를 설치했습니다.

외성은 약 10km의 둘레에 황성 정면에 있는 흐엉(香)강의 강물을 끌어 와

외곽에 폭 40m의 해자(垓字)를 파고

그 내부에 다시 폭 33m의 해자를 파서 이중구조로 만들었습니다.

후에황성 관광을 위해 전동차를 타고

외성 해자를 건너 외성출입문 중 하나인 광덕문을 통과합니다.

<광덕문(廣德門 : Quang Duc Mon>

해자를 건너면서 보이는 깃대(旗臺 Cot Co)는 마름모꼴로

앞쪽이 공격적으로 튀어 나와 있습니다.

3단 피라미드형으로 기단을 쌓아 중앙에 깃대를 세워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휘장을 가장 높게 걸었었다네요.

지금은 베트남의 상징인 금성홍기가 걸려 있습니다.

외성 안쪽에서 본 깃대의 모양입니다.

깃발까지의 높이는 37m랍니다.

원래는 기단 위에 나무로 기루를 쌓고 깃대를 세웠었지만

기루는 멸실되고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네요.

외성과 내성 사이는 잔디광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외성 밖에서 담은 깃대

외성 안쪽 남쪽에서 담은 깃대

17m 높이의 3층 건물인 응오문(午門)은 2대 민망왕 때 축조된 것이랍니다.

1층은 벽돌로 쌓고 그 위에 목조로 2, 3층을 지어 지붕에 기와를 올린 오봉루(五鳳樓)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광화문격인 오봉루의 바닥모양은 冂자 모양으로

좌우에 돌출된 부분에 두개, 가운데 3개 등 다섯개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유교문화권 대부분의 왕궁이 그렇듯

중앙의 출입문은 황제가 이용했고 좌우 출입문은 문무대신이

그리고 일반궁인과 나인들은 외곽출입구를 사용했습니다.

오문을 통과하면

정직탕평(正直蕩平)과 거인유의(居仁有義)가 앞뒤로 씌여 있는

문짝이 없는 중국식 문인 패루(牌樓)가 외삼문(外三門)격으로 서있습니다.

바르고, 곧게, 쏠림이 없이 정사를 펼치고

인에 머물고, 의를 따르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내성의 해자인 태액호(太液湖 : Ho Thai Dich)를 가로지르는

중도교(中道橋 : Cau Trung Dao)를 지나면

태화전(太和殿) 앞에

전면에 고명유구(高明悠久), 반대쪽에 중화위육(中和位育)이라 쓰여 있는

내삼문격인 패루(牌樓)가 서 있습니다.

황제의 밝고 높음은 영원하고 천인합일의 지위에 있다는 뜻일까요?

<중도교와 태화전>

중도교를 건너면 황궁의 정전이라 할 수 있는 태화전이 작고 아늑하게 서있습니다.

중국 자금성 보다 낮은 2단 높이의 평지붕 위에는

중앙과 좌우에 황실을 상징하는 용머리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지붕은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색 기와를 얹었네요.

태화전은 황제의 즉위식이나 공식 접견, 황실의례 등을 집전하던 장소로

앞마당인 대조원(大朝院)에는 경복궁의 근정전 앞마당처럼 품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아랫단에는 전설의 동물인 청동기린상 한쌍이 좌우에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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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액호 남동쪽에서

세조묘 방향 마당

전설의 동물 기린상

태액호 남서쪽에서 담은 오문과 중도교 전경입니다.

태액호 주변에는 사막의 장미라 부르는 아데니움이 커다란 관목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태화전에서 중도교와 오문을 담았습니다.

태화전 안쪽은 안타깝게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네요.

태화전의 뒷쪽입니다.

광장처럼 휑한 뒷마당

이 자리에 근정전, 건성전, 자금성 등의 궁궐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실되어 광장만 남아 있습니다.

태화전 뒷쪽에도 북동쪽과 남서쪽에 각각 패루가 서 있습니다.

태묘 가는 길

북동쪽 패루의 일정(日精)

태화전을 나와서 응우엔왕조에 현신한 공신들을 기념하는 공신각인

현림각(顯臨閣 : Hien Lam Cac)으로 향합니다.

현림각을 보려면 시멘트로 문루를 모자이크 형태로 만들어

도료와 도자기 등 색색으로 칠하고 용으로 장식한 묘문(廟門)을 지나야 합니다.

<묘문>

<현림각>

현림각은 목조 3층 누각으로

왕조의 위패를 모신 종묘 격인 세조묘(The Mieu) 앞쪽에 배치하여

공신들로 인해 왕실이 보위됨을 상징하는 셈입니다.

현임림 좌우측에 각각 건물 한 채씩이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도 없고 그 용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현림각 우측에서

현림각 전면 우측 건물

현림각 뒷편 서쪽의 준열문(駿烈門 : Tuan Liel Mon)쪽에서 담은 전경입니다.

상단에 종이 달려있는 범종각인 준열문을

안팎에서 담았습니다.

준열문 바깥쪽 전경

준열문 안쪽 전경

현림각 뒷편 세조묘(世祖廟) 전경입니다.

현림각과 세조묘 사이에는 9개의 청동 솥인 구정(九鼎 : Cuu Dinh)이 서있습니다.

청동 솥은 높이 1.9m에 무게는 1.6ton에서 2.7ton으로 조금씩 다르며

황실의 번영과 영속성을 기원하는 의미로

고정(高鼎 : Cai Dinh) 등 역대 황제의 이름과

해, 달, 별, 산, 강, 구름과 베트남 풍경과 생활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세조묘(世朝廟)는 단층 건물에

응우엔왕조 13대 황제중 3일 천자로 끝난 5대 죽득황제와

재위 4개월만에 독살된 6대 히엡호와황제

그리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시민권자로 살다

프랑스에서 죽은 마지막 13대 황제 바오다이를 제외한

10명의 황제와 황후들의 위패와 초상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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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적문(啓迪門)

현우문(顯祐門) 

현우문(顯祐門)

세조묘 좌측 끝에서

현림각쪽을 담았습니다.

세조묘 중앙에 서서 보니 넓은 마당 건너

현림각 동쪽의 법고각이 있는 숭공문(崇功門)과

범종루가 있는 서쪽의 준열문(駿烈門)이 한눈에 듭니다.

숭성문(崇成門)

후에성 내성 출입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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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성문(崇成門) 

응상문(應祥門)

 미상

세조묘를 나와

구운 벽돌을 깔아 만든 궁성 내의 도로를 지나

알 수 없는 건물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습니다.

당초 프로그램에는 오문과 태화전, 세자묘 방문만 계획되어 있어서

나머지 궁성이나 궁성터는 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옵니다.

전체적인 일정에

한글은 물론 영어도 안되는 현지인 가이드가 동행해서

황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광주 송정리의 어느 공장에 근무했었다는

현지인 가이드는 재치있는 한국말로

오문과 태화전, 세조묘만 설명하고 끝나버리니

나머지는 알지도 못하고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내부해자를 건너고

황궁에 들어갈 때와는 다른

북동쪽 해자를 건너 후에황궁 관광은

말 그대로 관광으로 끝내고 맙니다.

사실 자연경관이 아닌 역사문화시설을 보는 것은

사전에 준비를 하고 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더구나 준비도 없이 시간에 쫓기듯 보다 보니

사진도 제대로 담을 수 없었던 상황이 못내 아쉽습니다.



베트남 여행 중 씨클로 탑승체험은

마치 필수코스처럼 잡혀 있습니다.

출발 전에는 호이안에서 이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현장에서 일정을 수정 후에에서 체험하기로 합니다.

티엔무사원을 나온 우리는

호앙푸(HOANG PHU)레스토랑에서 베트남 현지식 점심을 먹고

자전거 인력거인 씨클로를 타기로 합니다.

식당 규모는 꽤 큰 편이고

한국 단체관광객들도 많이 찾아오는데

식사는 그저 그런 것 같습니다.

물론 메뉴를 보고 별도로 주문한 것이 아니라

가이드가 미리 셋팅해 놓은 것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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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외관 

식당 홀 

식당 휴게실 

점심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많은 대중의 교통수단인 베트남에서

씨클로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생계수단이기도 합니다.

"씨클로"라는 베트남 영화에서도

씨클로로 생계를 유지하는 베트남의 가정이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관광수입원 중 하나이기도 하다보니

베트남 당국에서도 씨클로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면허를 부여해서 관리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식사를 마친 우리에게도 각각 한대씩의 씨클로가 배정되었고

씨클로에 탑승한채 시내관광에 나섭니다.

대형버스와 승용차 사이를

위태롭게 지나기도 하고

자동차의 왕래가 비교적 적은 길을 택해

안전에 최대한 신경을 쓰는 것으로 보입니다.

걸어다니며 구경할만한 특별한 구경거리는 없는 길이지만

도로는 비교적 깨끗해 보입니다.

관광객용으로 면허를 받지 못한 씨클로는

이렇게 하릴 없이 기다려야 되기도 하겠지요.

비교적 가로정비가 잘된 곳만을 택해서 가는 것인지

깔끔한 Le Loi로를 따라 흐엉강(Perfume River)변 2월3공원(Park February3)도 지납니다.

Park February3 

Park February3 


사이공 모린호텔 후에 앞을 지나

흐엉강을 가로지르는 Trang Tien다리를 지납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그리고 씨클로만 다니는데

트러스트구조라는 게 특이합니다.

다리를 건너

Tran Hung Dao거리를 따라 우회전합니다.

TNL PLAZA건물 1층에 자리 잡은

롯데리아를 볼 수 있네요.

개척자 같은 의지의 한국 기업들,

대단합니다.

현대 아반테차종의 경찰 순찰차도 보이고

동바시장(Cho Dong Ba) 앞을 지나

약간 지저분해 보이는 길로 접어듭니다.

동바강(Song Dong Ba)변의 후인뜩강(Huynh Thuc Khang)로를 따라 갑니다.

강변 둔치에는 수령이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거대한 반얀트리가 가로수로 자라고 있네요.

반얀트리 

반얀트리 

기둥이 용으로 장식된 중국식 사원처럼 생긴 곳도 지나고


전자제품 등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

Durong Phan Dang Luu거리입니다.


동바강의 관광선

골목안 가로공원


어느덧 다시 Tran Hung Dao거리를 따라

후에시 문화센터 건물 앞을 지납니다.

강변공원 Tieu dinh Thurung Bac입니다.

근대 왕실이 주로 사용하던 곳으로 20세기 초에 후에를 방문한 외국 외교사절들을

흐엉강에서 유람선으로 접대하던 곳이랍니다.

인근에 있는 푸 호아초등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입니다.

Cau Phu Xuan교 교차로입니다.

전동카로 갈아타기 위해 주차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응우엔 호앙주차장(Nguyen Hoang Car Parking)입니다.

후에성을 관람할 관광객들을 태운 차량들은 이 곳에 대기하고

관광객들은 여기에서 전동카로 성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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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우엔호앙주차장

주차장의 관광버스들

대기중인 전동카들 

관광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을 태우기 위해 대기 중인 씨클로들입니다.

씨클로를 이용한 시내관광

일종의 슬로시티투어 같은 것입니다.

천천히 운행하는 씨클로가 지나는 도로변의 가게와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다만 낮은 씨클로에 앉아서 가는 것은

도심의 먼지와 매연과의 싸움을 감내해야 하며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야할 것입니다.

구글맵으로 검색해본 경로지도입니다.

빨간 선을 따라 이동한 시간은 약 40분정도네요.

씨클로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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