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베트남 다낭여행

밤이 더 아름다운 호이안

가루라 2019. 2. 4. 03:39

<내원교 일원의 야경>

베트남 다낭여행 셋째날 오전 일정

오행산 동굴 관람과 빙쿠라다이의 바구니배 타기 체험을 한 후

현지교민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마치고

벤에 탑승 호이안 도자기마을에 들렀습니다.

발물레를 돌리는 이벤트 외 특별한 관심거리가 없어서

도자기로 만든 포대화상 1점을 사고 바로 빠져나왔습니다.

배를 타고 투본강을 거슬러 마지막 행선지 호이안 올드타운으로 이동하는 중

투본강 수변에 보이는 주황색 기와에 하얀 벽의 2층 집들이

유럽풍처럼 아름답습니다.

호이안이라는 지명은 한자로는 모일 회(會) 평안 안(安)자 회안의 베트남식 발음입니다.

평화적인 모임지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만큼

15세기부터 19세기에 유럽과 동남아를 연결하는 동남아의 주요한 무역항으로 간주되어

서구에는 Fai-Fo 또는 Faifoo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었습니다.

베트남어로 Hoi An Pho(호이안마을)로 불렀던 것을

잘못들은 무역상들이 그리 불러서 Fai-Fo로 알려진 것으로 생각된답니다.

투본강을 따라 온 배에서 내리면

시원하게 자란 야자수가 이국적 느낌을 물씬 풍깁니다.

배에서 내린 많은 관광객들은 제각각의 방법으로 호이안 관광에 나섭니다.

이렇게 일행들과 한데 어울려 걷기도 하고

한사람씩 시클로를 타고 돌아보기도 합니다.

호이안은 베트남 꽝남(Quang Nam)지방에 있는 인구 19만의 작은 도시입니다.

호이안의 역사를 찾아보면

7세기부터 10세기 사이 베트남 중부지역을 지배하던 참파왕국(Champa)의 참족이

호이안을 통한 향신료의 전략적 거래 조절로 엄청난 부를 이루면서

이 무역 열풍을 따라 다양한 국가와 지역에서 몰려온

중국인, 포르투갈인, 일본인, 네덜란드인 그리고 인도인등이

자연스럽게 해변도시 Hai Pho(Hoi An)에 정착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실상 참파왕국의 상업적 수도였던 호이안에

다양한 나라와 인종이 뒤섞이면서

베트남 내에 독특한 건축과 주거구조를 이루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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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건물

독특한 건물들 

독특한 건물들 

독특한 건물들 


1535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안토니오 데 파리아(Antonio de Faria)가

다낭에서 내려와 호이안 항구마을에 무역중심센터를 세웠는데

응우웬왕조의 응우웬 호앙황제는 1595년 호이안을 무역항으로 지정하여

지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 결과 16세기 호이안은 유럽과 중국, 인도, 일본 사이에서

도자기산업에 있어서 강력한 무역거점으로 간주되었었습니다.

특히 일본과 중국 상인들은 그들만의 정착촌을 건설하기도 했지요.

<안호이교(An Hoi Bridge)의 수변 풍경>

그러나 18세기 말 무역거래에 반대하는 떠이선(Tay Son)의 반란으로 약해진

응우웬왕조의 몰락으로 호이안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자롱황제에 이르러 인근 다낭에 프랑스의 무역독점권을 부여하면서

마침내 호이안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지요.

<베트남 전통 웨딩촬영 모습>

호이안시대의 마감과 함께 내원교를 중심으로

서쪽편에 건설되었던 일본인 정착촌은 대부분 옛 모습이 사라졌지만

중국인 정착촌은 옛 건물 그대로 보존 유지되어 왔습니다.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무역항 시대의 유물들이

이례적으로 잘 보존 되어 있다는 점을 높이 인정받아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오늘날 많은 관광객들이 호이안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1980년에 베트남에 왔던 폴란드인 문화운동가 카지크(KAZIMIERZ KWIATKOWSKY 1944~1997)가

호이안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기여하였고

이러한 그의 노고를 기리는 기림비도 호이안에 세워져 있습니다.

<카지크 기림비>

호이안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가이드가 소개하는 곳은

내원교와, 광조회관, 풍홍의 집 등 몇 군데 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만의 느낌으로 고풍스러운 거리를 걸으며 느끼면 되는데

그러기에는 관광객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흠입니다.

베트남 토착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쩌면 호이안은 제국주의시대 수탈의 역사적 흔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아닐까요?

마치 요즈음 세간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목포의 적산가옥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보존해야 할지 없애야 할지는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달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 적산가옥의 다다미방에서 생활했던 제 기억으로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다다미방은 제 생리에는 맞지 않은 것이었지만...

<내원교>

내원교(來遠橋, Japanese Bridge, Chua cau, Cau Lai Vien)는

1593년 일본 상인들이 중국 상인 정착촌과 연결하기 위해 세운 다리랍니다.

길이가 얼마되지 않은 일본풍의 배부른다리로

상인들의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뜻으로 다리 위에 다리와 연결된 꺼우사원(다리사원)을 세웠는데

크기나 규모와 관계없이 그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지요.

이러한 흔적들이 진취적인 해양국가의 산물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훨씬 이전부터 전 세계에 그들의 문화와 문물을 전파했었다는 것이

부럽기도 합니다.

비록 우리나라에 대한 그들의 행짜가 졸열하고 밉기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로 보아 대단한 족속이라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네요.

<내원교 원경>

내원교를 지나면 일본인 정착촌이었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대부분 현대식건물의 상가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일본교(日本橋)라 쓰여진 등이 내걸린 풍홍의 집 2층 베란다에서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한 컷 담았습니다.

일본인 정착촌거리

일본교 인근 거리

일본 정착촌 거리


한국에도 그 브랜드가 수입되었다는 콩카페에도 가봅니다.

콩카페 내부 모습

 콩카페 내부

콩카페 커피


상인 턴키의 집

여가사


19세기 중국 광동지역의 상인들이 호이안에 정착하여

공자와 함께 문무이성 중 하나인 관운장(關羽)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그들의 안위를 기원하고

회합장소로 썼다는 광조회관(廣肇會館)도 들러보고

또 다른 중국식 건물, 아마도 복건성쪽 상인들의 회합장소로 보이는

복건회관(福建會館)도 담아 봅니다.

광조회관보다 내부에 볼거리가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입장권을 사지 않아서 밖에서만 보고 돌아섭니다.

 복건회관

복건회관 내부


호이안시장입니다.

길거리 풍경들

미술품 가게

미술품 가게


길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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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길거리에서


처음 도착했을 땐 그리 많지 않았던 관광객들이 시간이 갈수록 늘어서

사람을 피해 사진을 담는 것은 물론

교행하기조차 힘들어져서 투본강변쪽으로 나왔습니다.

강변풍경을 잡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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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본강

투본강

안호이교 


더위 속에 걷는 것에 지쳐갈 무렵

간단하게 발마사지를 받으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립니다.

야시장쪽에서 안호이교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담았습니다.(갤노트9)

삼각대가 없어서 노출을 최대한 개방한 카메라로 담은 야경들입니다.





야시장 풍경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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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

야시장

야시장


길거리에 넘쳐나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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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 관광객

야시장 관광객

야시장 관광객


그 사이 강변에는 어둠이 내리고

야간 보트를 즐기는 사람들과 구시가지 야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화려하게 채워졌네요.

우리 일행은 식당에 예약된 시간 때문에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하고 철수하기로 합니다.






강변에 세워진 등들을 폰카로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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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등

북등

기린등

등트리

동물등

오래 머무르지 못함이 아쉽고


삼각대를 가져가지 못했음이 아쉽고

자유여행처럼 다양하게 체험할 수 없었음이 아쉽고

또 하루의 여정이 끝났음이 아쉬운

호이안의 반나절 일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