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베트남 다낭여행

베트남 후에 민망왕릉

가루라 2019. 1. 17. 01:14

후에황궁을 나와 다시 찾은 곳은

황성 남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캄케산(HIEU SON : 孝山) 흐엉(香)강변에 자리잡은

응우옌왕조의 2대조 민망(Minh Mang : 明命)황제의 릉입니다.

민망황제는 자롱황제의 넷째 아들로 본명은 응우옌 푹 담(Nguyen Phuc Dam : 阮福膽)이지요.

나중에 응우옌푹끼에우(Nguyen Phuc Kieu : 阮福皎)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통칭으로 연호인 명명제(明命帝 : 베트남어 민망)로 부릅니다.

1791년 5월 25일 태어나서 29세인 1820년 2월 4일 즉위 후

1841년 1월 20일 사망할 때까지 21년간 베트남을 통치했습니다.

부친인 자롱황제보다 더 강경한 보수주의 쇄국정책을 펼쳤으며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기독교를 박해하고 중국식 복색을 장려하기도 할 정도로

베트남에서는 프랑스에 대항한 자주독립의 강력한 군주로 평가 받고 있지요.

식민지 확장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과 침략을 받았던 시기라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조선말의 상황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국에서도 황후와 후궁 등 43명의 부인으로부터 143명의 자녀를 두었다니

지나친 방사로 50세의 나이로 일찍 사망한 것이라는 호사가들의 입방아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가 봅니다.

ㅋㅎ 그런 민망왕의 이야기를 일반 관광객이 무덤에서 듣기에는 민망(憫惘)하지요.

<신월호(新月湖)반의 민망왕릉 전경>

민망황제는 재위 초기에 자신의 무덤 축조에 착수 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완성되지 않아서 그의 아들인 뜨득(Thieu Tri)황제가 완공했습니다.

무려 만명의 인부와 석공, 목공 등 장인이 동원된 당시로는 대역사였지요.

면적만도 15ha(약 150,000㎡)에 무덤인 현궁(HUYEN CUNG)외에도

비각과 황제의 옷을 보관하는 건물, 추모를 위한 건물 등 사후에 대비한 건물은 물론

생전에는 휴양시설로 쓸 수 있도록

독서를 위한 쭈이뜨짜이(Truy Tu Trai : 追思齋),

자연관찰을 위한 꽌란서(Quan Lan So : 觀蘭所),

사슴을 키우는 뚜안록히엔(Tuan Loc Hien : 馴鹿軒),

왕과 후궁들의 휴식처 린프엉깍(Linh Phuong Cac : 玲方閣),

낚시를 위한 정자 디에우응우딘(Dieu Ngu Dinh : 釣娛停),

신선한 공기를 즐기기 위한 응엔르엉관(Nghenh Luong Quan : 迎凉館),

휴식을 위한 호아이따(Hu Hoai Ta) 등을 호수변에 세우는 등

40여개의 건축구조물을 능역(陵域)내에 구축했지요.

민망황제의 능은 바로 앞에 있는 흐엉강의 물을 끌어와

휴양과 제례를 위한 부속건물을 둘러 싼 쫑민호(Ho Trung Minh : 澄明湖)와

초승달 모양으로 무덤을 둘러싼 떤누엣호(Ho Tan Nguyet : 新月湖)를 배치하여

하늘에서 보면 전체가 자궁 모양이 되도록 구성하였습니다.

자궁의 중심부에 무덤을 두고 대홍문으로부터 중앙을 관통하여 직선으로 연결되도록 함으로써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통로로 삼고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 천국에서 부활을 꿈꾸는 염원을 담았던 것이지요.

<민망황릉 출입구>

능원 입구 좌홍문에 이르는 길

따홍문(Ta Hong Mon : 左紅門)

주차장에서 내린 관람객은 사각의 보도블럭이 깔린 숲속 길 500여미터를 걸어야 합니다.

좌홍문에 이르기까지 녹음이 짙은 고요한 숲속길을

이름모를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기분은

민망왕이 꿈꾸었던 휴양소에 가는 기분입니다.

진입공간과 재실.재향공간, 전이공간, 능침공간 등 단촐하게 꾸며진

조선왕실의 왕릉과 비교해 보면 전체 구조면에서 훨씬 복잡하고 화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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쫑민호

수원 유입구

쫑민호

중국 왕실건축의 영향을 받은 조선왕궁과 마찬가지로

주출입문은 중앙에 배치한 삼문입니다.

황제의 시신이 반입된 후로 가운데 문은 한번도 열린 적이 없다는

다이홍문(Dai Hong Mon : 大紅門)을 중앙에 두고

문무백관과 황실 일족은 그 문의 좌우로 통과하게 했고

대홍문과 멀리 떨어진 좌우측에

좁은 양개문(兩開門)인 따홍문(Ta Hong Mon : 左紅門)과

흐우홍문(Huu Hong Mon : 右紅門)을 배치하여

일반 궁인들이 드나들도록 만들었습니다.

주출입구인 대홍문에서 비각에 이르는 앞마당은

황토로 구운 사각보도블럭을 깔았고

좌우에 코끼리와 말 그리고 문무인석을 세워 놓았습니다.

석상을 세운 것은 중국 고대 능묘제도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 왕실 무덤과 비슷하군요.

<바이딘(BI DINH : 碑閣)  앞마당의 대홍문과 석물들>

첫번째 만나는 건물은 아들 뜨득황제가 아버지의 공덕을 기려세운 공덕비가 있는

비각, 바이딘(BI DINH)입니다.

<바이딘 : 碑閣>

바닥에서 단차를 두어 2단 피라미드형으로 쌓아 올린 장방형의 기단 위에

높은 길이의 송덕비를 갈무리 할 수 있도록

지붕 중앙을 2층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홍문(大紅門 : DAI HONG MON) 

문인석과 비각

비각의 후면 북동향에서 담은 비각 전경입니다.

전후면 계단의 난간석은 꿈틀거리는 용모양으로 장식했습니다.

<비각>

비각의 정면과 내부 모습입니다.

내부는 중국황실을 모방하여 붉은색으로 단청을 했네요.

비문은 마모가 되었는지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고요.

바이딘(BI DINH : 碑閣) 정면 사진

비각 내부의 송덕비 

비각을 관통하여 후면으로 내려서면

약간의 단차만 두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는 네 블럭의 넓은 마당 끝에

이층으로 쌓아 올린 히엔득문(Hien Duc Mon : 顯德門)이 보입니다.

장방형의 마당과 좌우 대칭적으로 만들어진 호수

그리고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직선으로 뻗은 보도.

대칭적이며 균형적인 감각과 엄숙함이 느껴지는 구도입니다.

이 넓은 마당은 제례마당(San Chau)으로 사용됩니다.

제례마당 북쪽 끝에 서있는 중국식 문을 모방한 2층 삼문.

현덕문입니다.

왕은 덕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의미일까요?

팔작지붕 형태의 지붕에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기와를 올렸고

용마루 끝과 추녀 끝에 섬세하게 만든 용장식을 사방으로 달았습니다.

<히엔득문(HIEN DUC MON : 顯德門)>

닫혀있는 중앙의 문을 피해 좌우문으로 들어 가면

정면에 민망황제와 황후 타띠엔난(Ta Thien Nhan)을 숭배하는 사당인

디엔숭언(Dien Sung An : 崇恩殿?)을 중앙에 두고

좌우에 부속재실인 따뚱투(Ta Tung Tu : 左從寺), 흐우뚱투(Huu Tung Tu : 右從寺)가

단층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숭은전과 TA TUNG TU(左從寺?)>

디엔숭언(DIEN SUNG AN : 崇恩殿) 내부를 지나

묘역으로 향합니다.

문창살 사이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빛살이 신비롭습니다.

디엔숭언 뒷마당 좌우에 황족들이 머무를 수 있는 건물인

따뚱비엔(Ta Tung Vien : 左從院), 흐우뚱비엔(Huu Tung Vien : 右從院)이 있고

정면에 4단으로 쌓아 올린 붉은색으로 채식된

호앙짝문(Hoang Trach Mon : 皇宅門?)이 서있습니다.

<HOANG TRACH MON>

난간석이 용으로 장식된 계단 위에 서면

쫑민호를 건너 명루와 연결시켜주는 짧은 다리 꺼우쭝따오(Cau Trung Dao : 中道橋)가

잘 빚은 것처럼 단정하고 곱게 뻗어 있습니다.

<민러우(Minh Lau : 明樓) 가는 길>

중도교 입구에서 명루를 바라보니

이름 그대로 신선한 공기를 느낄 수 있게

좌우에 잘 자란 송림이 우거져 있네요.

<명루 가는 중도교>

2층 구조로 정사각형의 사각지붕인 명루(明樓)는

땅과 물과 하늘을 상징하는 3단의 사각 테라스 위에

사방이 열린 깔끔한 모습으로 앉혀져 있습니다.

내부는 붉은 단청으로 칠해져 있고

사방의 문을 열어 놓으면

황제가 청량한 기운을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로 설계되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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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H LAU(明樓) 

민러우(명루) 내부

민러우(명루) 후측방 전경

명루 후원에 조성된 정원(庭園)은 중앙 통로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적으로 설계되었고

황제의 장수를 상징하는 글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명루 북쪽 좌우 끝단 외곽 숲속에는

카이딘 왕릉에서 보았듯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높은 오벨리스크도 세워져 있군요.

<명루 동북방에서 본 명루와 숲속의 오벨리스크 그리고 정원>

명루 밖으로 내려서면 드디어 저 멀리 호수 건너편에

좌우로 길게 누워있는 동산 같은 민망황제의 무덤이 보입니다.

밖에서 보면 봉분이 전혀 보이지 않고 동산처럼 보여서

인위적이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것처럼 보이는 우리나라의 왕릉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릅니다.

마치 수변공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네요.

<명루 후원(後園)>

여러 개의 문을 지나고도 또 다시 패루 또는 패방이라 부르는

문짝없는 두 개의 문과 다리를 통과해야 황제의 무덤

후옌궁(Huyen Cung)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앞쪽 패루에는 정직하고 분명하다는 뜻으로 주자어류에 나와 있는 광명정대를

정대광명(正大光明)으로 순서를 바꾸어 써놓았습니다.

초승달 모양의 떤누엣호(新月湖)를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는 다리

꺼우통민찐쯕(Cau Thong Minh Chinh Truc : 松明正直橋?)을 건너면

학생기록부에서 보았음직한 총명정직(聰明正直)이라는 한자가 새겨진 패루 뒤에

시커멓게 빛바랜 시멘트 담장으로 둥글게 둘러싸인 봉분이 송림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황제의 무덤인 후엔궁입니다.

황제의 무덤은 높이 3m, 둘레 285m의 담장과 굳게 닫힌 청동문 뒤

지하에 있습니다.

1941년 황제의 시신을 묘지로 반입했던 지하통로는 영구히 봉쇄되었고

굳게 닫힌 청동문은 1년에 단 한 번

제삿날만 열립니다.

해는 벌써 묘역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울만큼 기울었네요.

다낭으로 돌아 갈 시간에 쫓기듯 돌아나오는 길

칼로 자른듯 열맞추어 서있는 신월호 위의 다리와 명루를 담아 봅니다.

좌우에 오벨리스크 키만큼 소나무가 훌쩍 자라서

처음에 조성했을 때와는 달리 보이겠지만

나무들이 관목처럼 낮았을 것이라 상상하며

묘역을 참 예술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다시 해봅니다. 

<꺼우통민찐쯕(CAU THONG MINH CHINH TRUC:松明正直橋)>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무덤방향으로 일제히 움직이는 비단잉어가

마치 무슨 전조증상처럼 느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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떤누잇호(新月湖) 

HO TAN NGUYET(신월호)

비단잉어 

우리나라에서는 유택을 정할 때

물이 많지 않은 땅을 선택하는데

일부러 인공호수를 만든 베트남왕의 생각은

무덤을 무덤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역사상 중국의 지배를 네 차례나 받았고

수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어쩌면 무덤을 무덤처럼 보이지 않게 할 의도도 있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도굴이나 훼손으로부터 자신의 유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좌측 오벨리스크>

호반에 지었다는 부속건물들은 눈에 띠지 않지만

호숫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슴과 소가 보입니다.

쫑민호(澄明湖)와 부속건물 터

꺼우쭝따오(CAU TRUNG DAO:中道橋)

묘역을 벗어나 입구의 푸른 숲을 보니

이곳이 묘역인지 공원인지 헛갈릴 정도 입니다.

같은 유교문화권이어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카이딘왕릉이나 민망왕릉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내세관은 우리와는 또다른 모습입니다.

얘기를 들었을 때는 묘역이 관광상품이라는 생각에 시쿤둥했었지만

와서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능역 안내도 

위성뷰로 본 능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