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베트남 다낭여행

베트남 후에황궁

가루라 2019. 1. 14. 05:55

후에 시내 씨클로관광 후

전동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후에황궁입니다.

다낭 시내 다낭미술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띠엔하이 시타델에서

이미 베트남의 축성방식 일부를 보았지만

이곳 후에황성에서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후에황성(Hoang thanh Hue, Hue Citadel, Imperial City)은

1802년부터 1945년까지 베트남을 지배했던 응우엔왕조의 궁궐로서

오늘날 베트남 최고의 문화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93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1947년의 인도차이나전쟁과 1968년 베트남전쟁으로

10여채를 남기고 소멸되어 버린

70여채의 전각 등 황성 복원작업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2008년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는 ODA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유산디지털복원기술로 후에황성을 3D 디지털로 복원하여 제공하기도 했었지요.

<후에황성 주출입문 오문(Ngo Mon : 午門)>

프랑스 신부의 도움으로 1802년 서산조를 멸망시킨 자롱제(Vua Gia Long : 嘉隆帝)가

통킹을 중심으로 북부를 지배하던 껄끄러운 찐가문을 피해

후에를 수도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1804년 후에황성의 축성을 시작했습니다.

자롱제는 본명이 응우엔 푹 안(阮福映 1762~1820)으로 황제에 즉위한 후

연호를 가륭(嘉隆)으로 정하였고

1804년 청나라에 의해 안남국(安南國)왕으로 책봉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도움으로 건국에 성공하여 프랑스인들에게는 우호적이었지만

프랑스의 통상요구를 일관되게 거부하여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었지요.

<여러 각도로 담은 오문>

01

02

03

좌측에서 담은 오문

해자와 오문

오문

후에황궁은 중국 자금성을 본 따 지은 궁궐로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입니다.

동서로 620m, 남북으로 604m 총 둘레 약 2.5km의 내성을

두께 10.4m, 높이 6.5m의 벽돌 조적으로 프랑스 보방식 성채를 쌓았고

성루에는 400문의 포를 거치할 수 있는 24개의 포대를 설치했습니다.

외성은 약 10km의 둘레에 황성 정면에 있는 흐엉(香)강의 강물을 끌어 와

외곽에 폭 40m의 해자(垓字)를 파고

그 내부에 다시 폭 33m의 해자를 파서 이중구조로 만들었습니다.

후에황성 관광을 위해 전동차를 타고

외성 해자를 건너 외성출입문 중 하나인 광덕문을 통과합니다.

<광덕문(廣德門 : Quang Duc Mon>

해자를 건너면서 보이는 깃대(旗臺 Cot Co)는 마름모꼴로

앞쪽이 공격적으로 튀어 나와 있습니다.

3단 피라미드형으로 기단을 쌓아 중앙에 깃대를 세워

황실을 상징하는 노란색 휘장을 가장 높게 걸었었다네요.

지금은 베트남의 상징인 금성홍기가 걸려 있습니다.

외성 안쪽에서 본 깃대의 모양입니다.

깃발까지의 높이는 37m랍니다.

원래는 기단 위에 나무로 기루를 쌓고 깃대를 세웠었지만

기루는 멸실되고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네요.

외성과 내성 사이는 잔디광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외성 밖에서 담은 깃대

외성 안쪽 남쪽에서 담은 깃대

17m 높이의 3층 건물인 응오문(午門)은 2대 민망왕 때 축조된 것이랍니다.

1층은 벽돌로 쌓고 그 위에 목조로 2, 3층을 지어 지붕에 기와를 올린 오봉루(五鳳樓)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광화문격인 오봉루의 바닥모양은 冂자 모양으로

좌우에 돌출된 부분에 두개, 가운데 3개 등 다섯개의 출입문이 있습니다.

유교문화권 대부분의 왕궁이 그렇듯

중앙의 출입문은 황제가 이용했고 좌우 출입문은 문무대신이

그리고 일반궁인과 나인들은 외곽출입구를 사용했습니다.

오문을 통과하면

정직탕평(正直蕩平)과 거인유의(居仁有義)가 앞뒤로 씌여 있는

문짝이 없는 중국식 문인 패루(牌樓)가 외삼문(外三門)격으로 서있습니다.

바르고, 곧게, 쏠림이 없이 정사를 펼치고

인에 머물고, 의를 따르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내성의 해자인 태액호(太液湖 : Ho Thai Dich)를 가로지르는

중도교(中道橋 : Cau Trung Dao)를 지나면

태화전(太和殿) 앞에

전면에 고명유구(高明悠久), 반대쪽에 중화위육(中和位育)이라 쓰여 있는

내삼문격인 패루(牌樓)가 서 있습니다.

황제의 밝고 높음은 영원하고 천인합일의 지위에 있다는 뜻일까요?

<중도교와 태화전>

중도교를 건너면 황궁의 정전이라 할 수 있는 태화전이 작고 아늑하게 서있습니다.

중국 자금성 보다 낮은 2단 높이의 평지붕 위에는

중앙과 좌우에 황실을 상징하는 용머리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지붕은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색 기와를 얹었네요.

태화전은 황제의 즉위식이나 공식 접견, 황실의례 등을 집전하던 장소로

앞마당인 대조원(大朝院)에는 경복궁의 근정전 앞마당처럼 품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아랫단에는 전설의 동물인 청동기린상 한쌍이 좌우에 세워져 있습니다.

01

02

03

태액호 남동쪽에서

세조묘 방향 마당

전설의 동물 기린상

태액호 남서쪽에서 담은 오문과 중도교 전경입니다.

태액호 주변에는 사막의 장미라 부르는 아데니움이 커다란 관목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태화전에서 중도교와 오문을 담았습니다.

태화전 안쪽은 안타깝게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네요.

태화전의 뒷쪽입니다.

광장처럼 휑한 뒷마당

이 자리에 근정전, 건성전, 자금성 등의 궁궐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실되어 광장만 남아 있습니다.

태화전 뒷쪽에도 북동쪽과 남서쪽에 각각 패루가 서 있습니다.

태묘 가는 길

북동쪽 패루의 일정(日精)

태화전을 나와서 응우엔왕조에 현신한 공신들을 기념하는 공신각인

현림각(顯臨閣 : Hien Lam Cac)으로 향합니다.

현림각을 보려면 시멘트로 문루를 모자이크 형태로 만들어

도료와 도자기 등 색색으로 칠하고 용으로 장식한 묘문(廟門)을 지나야 합니다.

<묘문>

<현림각>

현림각은 목조 3층 누각으로

왕조의 위패를 모신 종묘 격인 세조묘(The Mieu) 앞쪽에 배치하여

공신들로 인해 왕실이 보위됨을 상징하는 셈입니다.

현임림 좌우측에 각각 건물 한 채씩이 있는데

가이드의 설명도 없고 그 용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현림각 우측에서

현림각 전면 우측 건물

현림각 뒷편 서쪽의 준열문(駿烈門 : Tuan Liel Mon)쪽에서 담은 전경입니다.

상단에 종이 달려있는 범종각인 준열문을

안팎에서 담았습니다.

준열문 바깥쪽 전경

준열문 안쪽 전경

현림각 뒷편 세조묘(世祖廟) 전경입니다.

현림각과 세조묘 사이에는 9개의 청동 솥인 구정(九鼎 : Cuu Dinh)이 서있습니다.

청동 솥은 높이 1.9m에 무게는 1.6ton에서 2.7ton으로 조금씩 다르며

황실의 번영과 영속성을 기원하는 의미로

고정(高鼎 : Cai Dinh) 등 역대 황제의 이름과

해, 달, 별, 산, 강, 구름과 베트남 풍경과 생활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세조묘(世朝廟)는 단층 건물에

응우엔왕조 13대 황제중 3일 천자로 끝난 5대 죽득황제와

재위 4개월만에 독살된 6대 히엡호와황제

그리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프랑스시민권자로 살다

프랑스에서 죽은 마지막 13대 황제 바오다이를 제외한

10명의 황제와 황후들의 위패와 초상화가 모셔져 있습니다.

01

02

03

계적문(啓迪門)

현우문(顯祐門) 

현우문(顯祐門)

세조묘 좌측 끝에서

현림각쪽을 담았습니다.

세조묘 중앙에 서서 보니 넓은 마당 건너

현림각 동쪽의 법고각이 있는 숭공문(崇功門)과

범종루가 있는 서쪽의 준열문(駿烈門)이 한눈에 듭니다.

숭성문(崇成門)

후에성 내성 출입문들

01

02

03

숭성문(崇成門) 

응상문(應祥門)

 미상

세조묘를 나와

구운 벽돌을 깔아 만든 궁성 내의 도로를 지나

알 수 없는 건물을 지나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습니다.

당초 프로그램에는 오문과 태화전, 세자묘 방문만 계획되어 있어서

나머지 궁성이나 궁성터는 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옵니다.

전체적인 일정에

한글은 물론 영어도 안되는 현지인 가이드가 동행해서

황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없는 것도 아쉬웠습니다.

광주 송정리의 어느 공장에 근무했었다는

현지인 가이드는 재치있는 한국말로

오문과 태화전, 세조묘만 설명하고 끝나버리니

나머지는 알지도 못하고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내부해자를 건너고

황궁에 들어갈 때와는 다른

북동쪽 해자를 건너 후에황궁 관광은

말 그대로 관광으로 끝내고 맙니다.

사실 자연경관이 아닌 역사문화시설을 보는 것은

사전에 준비를 하고 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더구나 준비도 없이 시간에 쫓기듯 보다 보니

사진도 제대로 담을 수 없었던 상황이 못내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