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베트남 다낭여행

베트남 후에 카이딘황제릉

가루라 2018. 12. 31. 04:09

<카이딘황제릉 三關門>

다낭여행 둘쨋날 하이반고개를 넘어 도착한 후에의 첫번째 관광지는

카이딘황제릉(Thomb of Khai Dinh) 또는 카이딘왕릉이라 부르는 곳으로

후에 외곽 나즈막한 차우추산을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이국적인 건축물들을 대하게 되는데

마치 수천년 동안 비와 풍상 속에 까만 이끼가 켜켜히 내려 앉은 것처럼

고색창연해 보이지만

이 곳은 완공된 지 백년도 채 안 된 왕릉입니다.

한적한 시골길 같은 왕릉 입구의 매표소를 지나면

차우추산 자락을 가리고 있는 숲 사이로 뾰족탑이 날카롭게 보입니다.

01

02

03

왕릉 가는 길 

누리장나무 닮은 열대꽃 

숲 사이로 보이는 왕릉 

묘역 입구의 첫번째 계단을 통해 올려다 본 묘역입구입니다.

까맣게 그을린듯한 석주를 기둥삼아

세련된 문양으로 장식된 세개의 철문과

그 철문에 이르는 세갈래의 계단

그리고 그 계단을 구분짓는 거대한 용모양의 석조물이 위압감을 줍니다.

조선 왕궁의 돌계단 장식물은 대부분 해태상인데

베트남은 대부분이 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베트남에 있어서 용은 '번영과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카이딘황제릉은 세로 117m, 가로 48.5m의 직사각형 구조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성과 같은 형태로 디자인되어

점점 올라가는 5단의 건축영역이 127개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단에 올라서면 좌우로 공신들이 참배를 받는

좌청(TA TUNG TU)과 우청(HUU TUNG TU)건물이 있습니다.

이 릉의 주인은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 응우웬왕조의 제12대 왕입니다.

아버지 동카인황제가 너무 어려서 돌아가시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신민지왕조를 관리하던 프랑스가 짠따이(Thanh Thai)황제와

그의 아들 주이떤(Duy Than)황제를 내세웠지만

그들이 식민지지배에 항거하자 폐위시키고

1916년 9대 동카인황제의 아들 응우엔푹투안을 황제에 앉혔지요.

그가 카이딘(啓定)황제로 휘호는 무려 17자나 되는

사천가운성명신지인효성경태모승렬선황제(嗣天嘉運聖明神智仁孝誠敬貽謨承烈宣皇帝)입니다.

카이딘은 베트남어로 더 강한 안정과 평화를 뜻한다고 합니다.

베트남 국민들로부터는 재위기간 내내 "프랑스정부의 샐러리맨"으로 조롱을 받았을 정도로

프랑스식민지정부의 허수아비같았던 황제는 마약과 도박에 몰두했던 병약한 황제로

1885년 10월 8일에 태어나서 1925년 11월 6일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01

02

03

삼관문과 우청

삼관문과 좌우청

좌청(TA TUNG TU)

근세 우리나라에서 그랬듯

카톨릭교도 박해에 대한 프랑스신부 보호라는 명분을 앞세운 침공으로

1861년부터 완전하게 프랑스의 식민지지배를 받게 되었지요.

카이딘황제는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자신이 생전에 구축한 묘역은 동서양의 건축양식믈 융합한

베트남에서 가장 비싼 무덤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두번째 단 : 비각과 카이딘마당>

카이딘황제릉은 재위중인 1920년 축조를 시작하여

그가 죽은 이후인 1931년 완공되었습니다.

생전에는 휴양소로 쓰기도 했지만 그의 최후의 안식처가 된 것이지요.

입구에서 올라온 두번째 단(壇)에는

중앙에 카이딘황제의 아들 바오다이황제가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 비각과

좌우에 문무백관과 호위무사 그리고 말과 코끼리까지

각각 12석상이 도열해있습니다.

홀을 든 문인석 두쌍과 장검을 받쳐든 무인석 두쌍이

좌우의 앞열을 이루고 있네요.

공덕비 뒤편 좌우에는 첨탑모양의 서구식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상당히 정교하게 조각된 석상의 얼굴에는 외국인도 있는데

프랑스식민지지배의 영향이 반영된 것이겠지요.

이 묘역을 조성하기 위해 농민들에게 특별세까지 부과하여

국민적 저항을 받았던 황제에게 칭송할만한 공덕이 있을까 싶은데도

아들로써는 아비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었던가 봅니다.

후일 베트남 사람들은 카이딘의 유일한 업적은

스스로 만든 자신의 무덤뿐이라고 그를 폄하하기도 합니다.

01

02

03

04

카이딘마당 우측에서

카이딘마당 좌측에서

비각(碑閣)

세번째 단에서

2단에서 3단으로 오르는 계단은 경사가 제법 가파르게 되어 있어서

맨 꼭대기 띠엔띤궁을 정청으로 사용했다면

2단인 카이딘마당에 시립해있는 신하들은 보이지도 않을 표고차이입니다.

3단에는 특별한 시설물도 없고 앞뒤 폭도 작은 편입니다.

세번째단 우측에서

세번째단 좌측에서

네번째 단(壇)도 역시 특별한 조형물은 없지만

세번째 단보다는 앞뒤폭은 조금 넓은 편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 단에 황제릉이 있는 띠엔딘궁(天定宮 : Thien Dinh Palace)이 서있습니다.

외관은 유럽풍이지만 한자로 天定宮이라 양각된 위의 장식물로

귀면상과 용상으로 하여금 궁을 보호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좌측 창틀 위에는 논어의 안연편(顔淵篇)에 나오는

"위인유기(爲仁由己 : 인을 행함은 자신으로 말마암은 것이다)"를

우측 창틀 위에는 서경에 재상 중훼가 탕왕에게 군주의 도를 일러

"이례제심(以禮制心 : 예로써 마음을 다스려라)"을 양각으로 세겨 놓았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배웠던 한시와 다르게 11자로된 한시도 각자되어 있네요.

<좌측 끝에서 담은 띠엔딘궁 정면>

좌측의 한시는 사면헌기관풍경별개우주(四面獻奇觀風景別開宇宙)

억년종왕기강산장호저서(億年鐘旺氣江山長護儲胥)라 씌여 있고

우측에는 풍경무변만상신기천작합(風景無邊萬狀神奇天作合)

강산유주천추복음지유여(江山有主天秋福蔭地留餘)라 씌여 있는데

정확한 해석은 모르겠습니다.

한시를 잘 아시는 분 해석 부탁드립니다.

<우측 끝에서 담은 띠엔딘궁 정면>

띠엔딘궁 안에 들어서면

외관의 칙칙한 모습과는 달리 화려한 장식에 눈이 휘둥그레지지요.

궁은 벽과 칸막이에 의해 세개의 방과 세칸의 영역으로 나뉘어집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인조석으로 꾸며진 양쪽 방은

수호자들을 위해 남겨진 방으로 우측 방에는

카이딘황제가 사용했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중앙의 Khai Thanh Palace(계성전)은 세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맨 앞은 제단, 중앙에는 황제의 청동 등신상이

그리고 맨 안쪽에는 황제의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카이딘황제의 유구는 프랑스 마르세이유에서 주조해 온 자신의 등신상 18m 지하에

묻혀 있습니다.

<계정전(啓成殿) 정면>

계성전은 앞, 중앙, 뒷쪽 천장이 모두

아홉마리의 용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계성전 좌측에서

계성전 우측에서

계성전 중앙의 화려한 장식들을 보면

이 곳을 왜 제일 비싼 무덤이라 하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청동으로 주조된 황제의 등신상과 용상은 눈부신 금박으로 입혀져 있고

벽면과 단상 그리고 위패를 모신 탁자까지 도자기와 유리를 이용한

얕은 돋을새김(Bas Relief)양식 세공으로 섬세하게 장식되어

마치 칠보 세공을 해 놓은듯 금빛 찬란합니다.

화려한 계성전 실내 장식

01

02

03

계성전 맨 안쪽

황제등신상 전시공간

벽면 장식

좌측방(대기실)

우측방(유물전시관>

카이딘황제의 유물들

01

02

03

유물 

유물 

유물 

백성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황제는

정작 사후에 최고의 존엄을 상징하듯

그의 묘지는 더할나위 없는 화려함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카이딘황제릉은

20세기 초기 베트남 응우웬왕조 왕실건축의 유일한 성과물로

시멘트, 철, 철근, 석판타일 등의 프랑스 근대 건축자재와

모르타르와 적갈색 타일 같은 베트남 전통 건축자재들을 잘 배합한 가치있는 건축물입니다.

또한 미술, 건축기술과 건자재 등 새로운 요소를 이용한 근대적 석조와 콘크리트 구조물로

중국풍과 유럽풍, 로마양식, 고딕양식의 건물 외관과

유럽 성당과 흡사한 첨탑 등 다양한 건축스타일이 가미되었고

종교적으로는 불교, 유교, 힌두교 등이 복합적으로 녹아들어 있는 문화유산으로

오늘날 무덤의 주인에 대한 혹평과 달리 무덤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