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국내명소

덕수궁 다시보기

가루라 2014. 12. 23. 01:15

이십 몇년만에 덕수궁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 사진도 찍어줄겸

덕수궁에 들러 아이들 사진만 잔뜩 담았던 생각이 납니다.

그 때는 아이들 사진만 찍기에도 필름값에 인화비까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에

궁궐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었죠.

이제는 수백 수천장을 담아도 추가비용이 안드는 디지털화된 세상.

아이들 대신 파인더를 통해 궁궐을 찬찬히 드려다 볼 기회가 생겼네요.

 

사실 아이들이 훌쩍 커 버린 후로는

저도 직장내 직위가 올라가면서 더욱 더 직장생활에 얽메이게 되어

아이들이나 집사람과 고궁 한번 제대로 찾지도 못했었습니다.

지난 가을 남대문 근처에 있는 니콘서비스에 다녀 오는 길에

예정에 없던 덕수궁 산책을 혼자하게 되었지요.

 

대한문이 옆 건물의 그늘속에 대부분 잠길만큼 시간은 벌써 늦은 오후.

한 20~30분 쯤 후에 왕궁수문장교대의식이 있다는데 건너 띠고 궁궐로 바로 입장합니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리자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 곳을 1593년 선조가 임시거처로 사용하다가

너무 비좁아서 인근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저택까지 합쳐서 행궁으로 사용하면서

덕수궁은 황궁의 초석이 되게 되었습니다.

1608년 서청에서 즉위한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가면서 1611년 경운궁으로 불렀답니다.

인조가 이 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하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도 경운궁은 제대로 된 왕궁이 아닌 행궁일 뿐이었습니다.

그 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으로 아관파천을 했던 고종이

러시아공사관 인근에 있던 경운궁으로 대비와 태자 등 왕족을 피난시키고

1897년 자신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거쳐를 옮기면서

본격적인 궁궐로 형태를 잡기 시작했었지요.

그로부터 궁궐의 영역도 넓어지고 궁내에 현대식 건물 등 많은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경복궁이나 창경궁 등 여러 다른 궁궐에 비해 전통적 배치가 아닌 약간 어수선한 궁궐 배열입니다. 

경운궁은 1907년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를 하면서 이 곳에 상주하게 되자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으로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난번 포스팅했던 경희궁에 비해서는 그래도 조금 덜하지만

풍운의 구한말과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일제에 의해 많은 건물들이 철거되거나 소멸되고

궁궐의 영역도 열강의 공관이나 개인, 학교부지로 잘려나가는 아픔을 겪었던

고난의 역사의 살아있는 현장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대한문 전경>

경운궁의 정문은 원래 중화문 남쪽에 남향으로 서있는 인화문이었습니다.(지금은 사라지고 없음)

1906년 화재로 소실된 중화전을 재건하면서 동문이었던 대안문을 대한문으로 바꾸고

덕수궁의 정문으로 쓰게 되었답니다. 

덕수궁 왕궁수문장교대식은 11시, 14시, 15시 30분에 있다는데

입장했을 때 한창 마지막 교대식을 준비 중이네요.

수문장 교대식을 자주 봤던 경복궁보다는 장소도 협소하고 행사요원도 더 적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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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장 교대식 준비 중 

수문장 교대식 

 수문장 교대식

서울 도심 어디가나 그렇듯 단풍이 절정을 이룬 덕수궁에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더 많아 보입니다.

<중화문 정면 전경>

中和門은 덕수궁의 중문이며 정전인 중화전의 정문으로

정면 세칸, 측면 두칸의 단층 팔작지붕입니다.

주변에 연결되어 있던 행각들은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모두 철거되어 버리고

지금은 동남쪽에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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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안쪽 

중화문 동쪽 

중화문 북동쪽 

행각과 중화문 

<중화전(中和殿) 정면 전경>

덕수궁의 정전인 中和殿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중층으로 지어졌으나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재건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축조되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이 전측면 각각 다섯칸의 복층임에 비해

중화전은 전면 다섯칸 측면 네칸의 단층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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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 뒷면 

남서쪽 

남동쪽면 

남동쪽면 

서쪽 뷰 

<중화전 내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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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의 어좌 

용상 위 천장 

중화전 전면 우측 향로 

<석조전 정면 전경>

전통건축양식의 궁궐 속에 있는 덕수궁 석조전을 볼 때마다 과도기적 고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영국인이 18세기 유럽궁전양식을 설계에 반영하여 착공 10년만인 1910년 완공했습니다.

1층 거실, 2층 접견실 및 홀, 3층 황제와 황후의 거실, 침실, 욕실이 있는 3층 석조건물로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당시 서양식 건축물 중 가장 규모가 컸답니다.

사실 아름다운 문화적유산으로 꼽히는 모스크바의 크렘린궁도

러시아전통양식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이 지은 것이니

석조전 자체는 특별히 역사적 수치의 산물이라고 볼 것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여러 각도의 석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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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 좌측 원경

전면 좌측

전면 좌측

전면 우측

해방 이후 여러 용도로 이용되어왔던 석조전은

미소공동위원회장,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장 등으로 쓰이다가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바뀌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석조전 별관에서 파노라마로 담은 덕수궁>

<석조전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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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별관 전면

석조전 별관 회랑

석조전 별관 후면

석조전과 별관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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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옥외회랑 

대한제국역사관 

건축자재관 

구한말 전철풍경 

구한말 덕수궁 

<준명당과 즉조당 정면 모습>

준명당(浚明堂)은 덕수궁의 내전으로 1897년 건축되었으며

온돌시설이 되어 있어서 고종이 정무를 보던 편전 또는 침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후원에 남아있는 굴뚝의 문양조차 가을의 깊은 풍취를 더해줍니다.

한동안 덕혜옹주를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는데

옆에 붙어 있는 즉조당(卽阼堂)과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란히 붙어 있는 즉조당은 임금의 침전으로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에 오른 후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녹색과 적색 그리고 황금색을 더해 만들어진 즉조당 천장의 단청은

화려하면서도 왕실의 기품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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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 굴뚝 

준명당 

즉조당 준명당 

즉조당 천장 

즉조당 전면 

<석어당(昔御堂) 정면 모습>

석어당은 덕수궁에 남아있는 유일한 중층건물로 궁궐양식의 다른 건물과 달리

지붕 위의 잡상 등 어떤 장식도 없는 일반 양반가의 집처럼 보입니다.

선조가 임란 후 환도해서 16년간 어소로 썼다는데

저물 석(昔)자를 써서 석어당이라 부르게 된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과 왕실을 보면서

궐이 아닌 왕가의 일반 집에 기거하는 선조의 심경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인목대비가 폭정하는 광해군을 앞뜰에 꿇어 앉혀 문책을 하던 곳이라 그렇게 부르는지...

게다가 다른 건물과 달리 가칠도 하지 않아서

더욱 더 을씨년스럽게 보이네요.

 

<다른 각도에서 담은 석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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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어당 전면 우측 

석어당 서쪽면 

즉조당과 석어당 

석어당 동쪽면

석어당과 정관헌을 연결하는 석류문

<정관헌(靜觀軒)>

정관헌은 우리에게는 익숙치 않은 로마네스크양식으로 1900년에 지은 회랑형 건축물입니다.

고종이 차를 마시거나 음악을 감상하며 조용히 함녕전, 덕홍전 등을 내려다 보는

얕으막한 동산의 소나무 숲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구한말 외국공사 등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다는군요.

얼핏 겉모습이나 테라스, 천장의 문양을 보면 아라베스크를 연상하게 하네요.

<다른 각도에서 담은 정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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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조당과 정관헌 사이 문 

정관헌 전면 

정관헌 내부 

<덕홍전(德弘殿) 정면 전경>

임금의 침전인 우측의 함녕전과 나란히 서있는 덕홍전은 덕수궁의 편전입니다.

편전은 임금이 평상시에 기거하면서 정무를 보던 것으로

정전에서 처리하는 비중있는 정사 보다는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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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 좌측면 

덕홍전 천정 

덕홍전과 행각 

덕홍전 행각 출입문 

<함녕전(咸寧殿) 정면 전경>

고종황제의 침전이었던 함녕전은 또다른 침전인 즉조당과는 달리

지붕 위를 여러가지 잡상들로 장식하고 있고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마감한 천장도 봉황무늬로 화려하게 칠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한옥에서 보듯 대청마루의 앞뒤 창은 통풍과 채광이 잘 되도록 메달아 놓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함녕전의 정문이었던 광명문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제가 곳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놓았음이 한탄스럽네요.

<다른 각도에서 본 함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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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 좌전면 

함녕전 천장 

함녕전 내부 

함녕전 후원 

함녕전 행각 

<함녕전 남쪽과 동쪽 행각>

<덕홍전과 함녕전 남쪽 행각>

광명문(光明門)

덕수궁 남서쪽 후미진 곳에 있는 광명문은

현판을 보지 않으면 이 곳이 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처구니 없게도 신기전을 쏘는 화차와 자격루, 물시계 등이 전시되어 있고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인 정릉을 수호하기 위해 세웠던 정릉 흥천사의 동종이 놓여 있습니다.

일제가 1938년 석조전의 별관(서관)인 이왕직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니

왕궁에 흐르는 모든 맥 곳곳을 절단해 놓았음에 다시금 분노하게 하는군요.

광명문 북서쪽 

광명문 북동쪽 

일제의 36년 수탈을 치른 이 땅 어디엔들 그들의 만행과 상처가 남아있지 않은 곳이 있겠습니까만

그동안 별 관심을 두지 못했던 역사문화재들을 찾아 다니다 보니

정말 용서받지 못할 자들이라는 생각이 더 해집니다.

역사적 문화적 지식이 일천하여 고작 위치로 확인할 수 있는 겉만 보고도 그럴 정도이니

그들의 수탈의 역사를 내용으로 더 깊이 알게 되면 더 끓어 오르겠지요.

 

아베의 집권 후 갈수록 우경화가 심해지고 있는 일본 정부와 일본 보수 군국주의자들의 준동을 보면서

온 국민은 물론 대통령과 우리나라의 외교를 관장하는 부처의 관료들이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구한말의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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