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세상 사는 이야기

적대적 공생과 상리적 공생

가루라 2015. 11. 20. 00:11

자연계에 있어서 공존은 참 쉽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단순한 삶을 넘어 서로 더불어 사는 공생관계를 이루는 생물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상호간 이익을 나누는 상리적 공생은 기본이고

이타적 공생을 넘어

숙주를 먹이로 바치고 사는 기생충까지

삶의 형태는 다양하기 짝이 없습니다.

비단 동물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종 즉 동물과 식물간에도 이런 공생관계는 쉽게 존재합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간의 관계는 늘 일방적이지요.

야생상태에 있던 동물을 포획하여 길들인 것이

가축이고 애완동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손에 버려진 길고양이나 들개화된 애완견에 관한

인간의 증오심이 요즈음 종종 기사화 되는 것을 봅니다. 

 

이웃 동네 쓰레기 적치장에서 만난 길냥이

그 표정에서 섬짓한 증오심을 보는 것 착각일까요?

어쩌면 길냥이와 인간은 적대적 공생관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냥이에게 먹이를 주는 것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밤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고양이들의 세력다툼을 위한 싸움 소리가 싫고

쓰레기 봉지를 헤집어 놓는 지저분함이 싫은 사람들은

고양이를 끌어드리는 소위 캣맘을 싫어 할 수 밖에요.

 

그러나 그 대상이 이런 야생오리라면

야생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한없이 목가적이고 평온해 보이지요.

딴전을 피우는 사람에게 빨리 달라고 보채기까지 할 정도로 말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눈은 항상 이렇게 양면성이 있는게 아닐까요?

그래서 무학의 말처럼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는 것이겠지요.

IS의 비인도적인 잔인한 테러로 인한 이슬람에 대한 혐오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내용을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로 귀결될 것입니다.

북아프리카나 서남아시아의 이민자들이

세기말에 한 때 그들을 지배했던 프랑스로 인간다운 삶을 것을 찾아

이민하거나 밀입국을 하지요.

그러나 인간다운 삶은 커녕 먹을 것조차 제대로 손에 쥐지 못하고

주류사회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을 경우

그들은 폭력성과 저항감을 축적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결국 IS처럼 조직화하는 단체를 만나면 본격적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지요.

 

걱정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럴 가능성이, 그럴 수 있는 씨앗이 계속 잉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족적 단일성에 대한 자부심이 컷던 나라에 유입된 외국인 노동자.

그들이 주류사회로 편입되지 못하고 계속 차별적 처우를 받을 경우 내재될 저항의식.

거기에다 기본적으로 청년실업으로 인해 장기간 실업상태에 있는 자국민.

늘어나는 소득 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

다문화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사회공동체로 편입되었을 경우 예상되는 상황들.

국가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부분들.

국가가 다 커버할 수 없는 영역을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 모두가 걱정해야할 때가 아닐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