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국내명소

남연군 묘역에서

가루라 2017. 11. 3. 00:02

가야산에 올랐다가 하산하던 길에 들린 남연군의 묘

남연군의 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의 주봉 석문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부친 남연군 이구의 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었습니다.

조선 말기 안동김씨의 세도에 왕실조차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자신을 감추었던 흥선의 기행은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상갓집 개라는 수모를 받아가면서도 명당을 찾아 남연군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왕가를 재건할 꿈을 꿉니다.

지관 정만인(鄭萬仁)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라는 추천으로

당초 이 곳에 서있던 가야사라는 절을 밀어내고

5층석탑이 있던 자리에 돌형 혈장을 씁니다.

교통이 원할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경기도 연천에서 충남 예산까지 관을 운구해 오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500리를 기준으로 그 지역 주민으로 하여금 인계를 받아

이동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하니 흥선이 아니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있었을까요?

관을 운구하는 데 썼던 상여는

마지막구간을 담당했던 덕산군 광천리 남은들 주민들이 극진히 모셔서

광천리 마을에 하사가 되었고 이를 남은들상여라 불렀다고 합니다.

전통 장례를 치르던 옛날에는 마을 후미진 곳에 행상집이라 하여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하던 집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잘살지 못하는 마을은 이웃마을에서 빌어썼으니

상여도 마을의 큰 자산이었던 셈입니다.

흥선은 묘역 조성을 위해 불가하게 철거했던 가야사 대신에

가얏골 상거리에 보덕사를 지어 줌으로써 이를 보했다고 하지요.

예로부터 지기(地氣)가 센 곳에 지세를 누르기 위해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 땅에 묘를 이장했던 흥선은 정말 뱃보가 큰 인물이었을까요?

어쩌면 대체지에 절을 지어 줌으로써

그 지세를 누끄려뜨리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지관의 예언대로 고종과 순종 2대를 거쳐 왕을 배출했으니

이대천자지지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셈입니다.

그러나 기실 남연군묘의 역사적 의의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됩니다.

서양 열강의 개국요구를 철저히 배척하던 흥선 대원군을 협박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필리핀 등 여러나라의 인물들의 지원을 받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당이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벌립니다.

그리고 남연군묘 도굴 미수사건은 우리나라 근대사 전환기의 방향을 결정하는

커다란 사건 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법은 의미가 없지만

이런 다국적 파렴치범들로 인해 대원군은 더욱 더 강한 쇄국정책을 펴게 되고

천주교를 더욱 핍박하게 된 게기가 되었습니다.

역사선생님의 인솔 하에 남연군묘를 찾았던 학생들

그들은 이 역사의 현장에서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01

02

03

관을 운구했던 남은들 상여 

봉분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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