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행차/베트남 다낭여행

다낭 박물관

가루라 2018. 12. 18. 23:50

까오다이교(高臺敎)사원을 나와 두번째로 방문한 곳은

다낭박물관 Bao Tang Danang(Museum of Da Nang)입니다.

다낭 시내에는 총 다섯개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부베트남을 지배했던 샴족의 샴조각박물관(Bao Tang Dieu Khac Cham),

근현대미술작품을 전시한 다낭미술박물관(Bao Tang My Thuat Da Nang),

500점 이상의 관음보살상을 메인홀에 전시한 베트남 최초의 불교문화박물관(Bao Tang Van Hoa Phat Giao),

자연 숲과 문화예술공간이 잘 어우러진 고대물품을 전시한

동딘박물관(Bao Tang Dong Dinh)이 그것입니다.

그 중 다낭박물관은 어쩌면 잡화점과 같은 느낌이 드네요.

단일 주제가 아니라 근현대 위주로 이것 저것 뒤섞어 놓은...

Tran Phu 24번지에 있는 다낭미술관은

1823년 재축조된 띠엔하이성(Dien Hai Citadel) 터 위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낭 박물관 입구의 복원된 해자>

1813년 자롱황제 시절 다낭을 가로지르는 한강 어귀에 세워졌던 Dien Hai Fortress를

민망(Minh Mang)황제 시절인 1823년 도심 안쪽으로 이전하여

다낭의 중심부 가까이 한강 서쪽 작은 언덕에 재축조하고

Dien Hai Citadel로 개명했습니다.

1847년 뜨득(Thieu Tri)황제 시절에 성채의 외곽을 550m로 확장하면서

3m 깊이의 해자(垓字)를 파고 성곽의 높이를 5m로 높이는 등

서구의 보방식(Vauban style) 벽돌 성채로 개선했다네요.

성채는 남쪽 주출입문과 동쪽 성문 등 두 개의 성문,

그리고 성주가 기거하는 궁과 깃대를 둔 문루, 식료품과 무기를 쌓아두는 창고로 구성되었고

대형 화포 30문이 거치되었습니다.

해상을 통해 침입하는 적을 막았던 우리나라 강화도의 광성보, 초지진 등과

여러모로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다낭박물과 입구 근처에 있는 다낭시 청사와 노보텔호텔 건물입니다.

시청사 건물 외관이 기다란 물병모양으로 특이하네요.

1858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이 다낭을 침공했을 때

인근 두 개 지방에서 4,000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응우엔 찌 푸엉(Nguyen Tri Phuong)장군의 지휘 아래 띠엔하이성에서 이를 격퇴하였고

그 후 1860년까지 크고 작은 외세의 침공을 막아내는 중요한 요새가 되었습니다.

다낭전투에서 그 전공을 인정받았던 응우엔 찌 푸엉(1800~1873)장군은

후에 뜨득황제의 고문으로 임명되어1861년 쟈딘(Gia Dinh)전투, 1873년 하노이전투를

잇따라 치루었으며 1873년 하노이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프랑스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프랑스군의 치료를 거부하고 1873년에 사망한

베트남의 이순신장군 같은 영웅이지요.

아래 좌측 사진처럼 다낭박물관 입구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그의 동상이 서있어서

외세의 침범을 입구로부터 막아내는듯한 형상입니다.

응우엔 찌 푸엉 동상과 다낭박물관 

박물관 입구에서 본 시청사 

3,000㎡의 띠엔하이 성터는 1988년 베트남정부에 의해 역사유물로 지정되었지만

프랑스 식민지배 시대와 현대화 과정에서 띠엔 하이성의 해자는 땅 속에 묻혀 버리고

그 흔적조차 모르고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2004년 인근에 주택건설을 위한 굴착 과정에서

서쪽 벽을 따라 조성된 해자가 발견되었지만

대부분이 가정집 지하에 묻혀 있어서

24m 정도만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고 중단했답니다.

박물관의 로비는 넓었지만 어두컵컴한 조명으로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기대를 하고 갔던 다낭박물관은

말 그대로 박물관입니다.

1층과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해상자원, 지질자원 관련 자료, 농업, 어업관련 자료

그리고 베트남의 근대 민속물품, 베트남 남북전쟁 관련 물품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해상자원진열관 

지질자원 진열관 

베트남 근대의 민속으로 해신제 또는 풍어제를 지내는 그림입니다.

신당에 제를 지내는 모습이나 어구, 농기구 등을 보면

한자문화권인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명나라시절까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니

오랜 시간 한자문화와 유교문화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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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어제 복장

어구 

농기구 

유물 발굴 현장을 그림과 밀납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유물 발굴을 통해 발견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중국식 유물과 화폐, 한자로 쓰여진 우물 표지석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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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유물들 

출토 엽전 

한자로 표기된 우물표지석 

농사를 짓는 풍경 그림과 농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낭 시내를 관통하는 한강 하구 풍경 그림입니다.

이역만리에 와서 우리의 한강과 같은 이름의 한강을 만날 줄을 생각도 못했습니다.

남북 베트남전쟁 당시

땅굴 속에서 생활했던 저항군 관련 자료관과

전쟁 무기 들이 전시되어 있었지만

분단된 동족간 외세의 힘을 등에 업은 전쟁은 상기하고 싶지 않네요.

한약방 축소전시물

옛날 시골의 우리나라 한약방이 생각납니다.

베트남 신화에 용족이 등장할 정도로

베트남은 용을 성스러운 동물로 여깁니다.

좌측 사진은 장례식에 쓰는 관인데 뚜겅에 용을 양각하여 만들었네요.

우측 사진의 기구는 직조기처럼 생겼지만

설명을 보니 수압으로 가동되는 악기라고 되어 있네요.

물이 연주하는 악기라!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용관(龍棺)

악기(Hydraulic Musical Instrument)

유교문화권의 전시물품들은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3세기 Ly왕조가 멸망한 후 그 후손이 고려에 와서

우리나라의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은 사실이었을듯 싶습니다.

박물관 입구 1층 로비에 붙어 있는 대형 동부조 조각 작품을 보면

베트남이 옛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좌측부터 원시 수렵채취시대부터 우측에 현대까지의 특징을 양각해 놓았고

가운데는 여(黎)라는 군령 깃발이 나부끼는 아래에

큰 칼을 찬 장수와 군졸들이 양각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상단 두루마리 모양에는 한자로 칠언시가 각자되어 있네요.

"三更夜靜銅龍月(삼경야정동용월)

五鼓風淸鷺鶴船(오고풍청로학선)"

"삼경이라 깊고 고요한 밤 동용문에 달이 뜨면

다섯개의 북소리 맑은 바람따라 노학선에 이르네."

장수의 비장함이 이 정도면

이순신 장군에 비견할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쉽게도 새겨진 장수의 이름도

칠언시를 쓴 장수의 이름도 확인을 못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나와 똑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보통은 동질감보다는 왠지 불쾌한 기분이 들지요.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에서

우리 몸에 내재된 문화와 동질감을 확인하는 것은

오히려 고국에 있는 것 같은 차분함을 주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그게 비록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지만

여행의 기쁨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확인하는 기쁨도 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암튼 전시물품이나 박물관의 주제가 뚜렷하지 않았어도

베트남 방문의 첫인상에 익숙한 공감대를 만들어 주는 코스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음 예정지는 다낭대성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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