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자연/世上山行

오대산 단풍산행

가루라 2011. 10. 19. 09:52

가을 내내 메말랐던 대지

낙엽들이 바싹 마른 몸을 서로 비벼 바스락 거릴 때

우리는 가을로 떠났습니다.

 

약 30년전 그룹공채로 입사했던 신입사원 시절을 반추하며

온 산을 붉고 노란 단풍으로 물들일만큼

당찬 호기와 패기로 만났던 입사 동기들이었습니다.

 

어느 새 다들 현직에서 물러나

비록 작지만 자영업으로 나름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

그 사이 계급장처럼 늘어난 주름과 반쯤 머리를 덮은 백발이 상징하듯

당일치기 대청봉 산행 추진에 지레 겁먹을 만큼

약골로 변해버린 동기들이

오대산 비로봉만을 찍기로 하고 산행을 출발합니다.

 

서울을 출발한지 두시간

오랜 가을 가뭄 끝 단비가 예보되어 있었지만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빗발이 제법 굵어 집니다.

기상청은 무시해도 괜찮을 만큼의 1~4mm의 가을비를 예보했는데

예상보다 많은 빗속에도 무리한 산행을 강행하기로 합니다.

산행 초입 황홀하리만치 붉게 물든 단풍이

비를 맞아 오히려 더욱 더 붉게 타는 것 같습니다.

 

 

다들 비옷과 방수커버로 덮은 배낭을 매고 오대산 단풍속으로 빠져 듭니다.

상원사 오르는 길

수능합격을 기원하는 우산을 쓴 학부모들의 발길이 잦습니다.

숲속 평지길은 온통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장막을 친듯합니다.

사자암 오르는 길

어두운 숲사이로 약하게 스며드는 빛에

단풍은 운치를 더해 갑니다.   

 

 천산만홍(千山滿紅), 만산홍엽(萬山紅葉)이라 해야 하나요 !

안타깝게도 제한적인 시야만을 확보할 수 있는 빗속임에도

굳이 멀리 볼 수 없음을 안타까워 할 필요도 없이

빨강, 노랑, 주홍, 주황 갖가지 물감이 손끝에 묻어 나올 것만 같네요.

계단식으로 층층이 쌓아 올린 비에 젖은 사자암의 지붕조차 아름답다 할 밖에요.

함참동안 눈안을 가득 물들인 단풍은

이내 가슴 저 밑바닥까지 격하게 타오릅니다.

아, 타오르는 단풍을 가을비로는 감히 끌 수가 없을 것 같네요 !

애써 격해진 감정을 뒤로 한채 한참 앞서간 일행을 뒤쫓습니다.  

적멸보궁을 옆에 두고 바로 오름에 들어 갑니다.

단풍에 붙들린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계단들이 이어집니다.

뒤따르는 시니어산악동호인들의 발걸음도 무거워지고

제 일행은 꽁무니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도 산을 전투적으로 대할 힘이 그들에게는 남아 있나 봅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단풍나무는 찾을 수 없고

갈색으로 물든 참나무 군락의 단풍이 절정을 이룹니다. 

드디어 1,563m 비로봉 정상입니다.

상원사에서 3.5Km, 해발고도로 660여미터를 오른 거랍니다.

왕복 3시간 코스라니 오십대 후반의 그닥 산행을 즐겨하지 않는 저와 같은 체력에도

적당한 구간의 산행코스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정상에 오르자 세찬 비바람에 쫓기운 구름들이

허겁지겁 산등성이를 넘습니다.

오롯이 비바람을 맞는 비로봉 표지석을 두고 서둘러 인증샷을 날립니다.

오래 지체할 수 없을 만큼 춥고 세찬 비바람과 다음 일정에 쫓기어

상왕봉으로 도는 코스를 포기하고 바로 하산에 들어 갑니다.

렌즈에 날아든 빗방울과 산허리를 타고 오르는 안개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원거리 시계는 제로에 가까워 집니다.

갈참나무 단풍도 비를 맞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제 색깔을 뽑내나 봅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졌다는 적멸보궁

가족의 안녕과 수능합격, 사업번창, 소송승소 등 각양각색의 소원을 꼬리표로 단 연등들

세상에는 희망하는 것들로 넘쳐납니다.

속세의 이 많은 발칙한 오욕들을 불가에서 모두 다 떠안나 봅니다.

신자들의 갖가지 간절한 발원을 매단 연등은

안개비 속에 묻혀 있고

오직 대자대비하신 부처님만이 그 결과를 아시겠죠 !

무지개 떡으로 허기를 면케 해준 적멸보궁을 뒤로 하고 하산을 재촉합니다.

안개와 짙은 회색 나무등걸, 빨갛고 노란 단풍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냅니다.

오를 때와 달리 사자암도 안개 속에 젖어 있습니다.

진한 연무에도 불구하고

노랑, 빨강, 주황, 주홍 단풍과 초록빛 전나무의 그라데이션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산발치로 내려 갈수록 안개는 엷어지고

단풍도 점점 더 제 색깔을 찾아 갑니다.

 또 다시 시작되는 단풍숲 터널

 소로위에 나뒹구는 낙옆조차 향기롭습니다. 

금기시 되던 빨간색이 어쩜 이렇게 고울 수가 있을까요 !

수명이 다한 단풍잎은 낙옆이 되어

길에도 계곡에도 오색보료처럼 포근히 쌓여 갑니다.

하산길에 담은 단풍 사진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말없이 감상에 젖어 봅니다.

 

 

 

 

하산길에 원없이 담은 단풍들

비록 시야가 제한적인 빗속이었지만

맑은 햇빛 속에 보는 단풍과는 또 다른 운치있는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전혀 손색이 없습니다.

 

단풍을 제대로 즐기고

아름다운 단풍사진을 담으려면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계곡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돌아 오는 길 차안에서 단풍으로 물든 계곡을 바라보며

창밖으로 낙엽처럼 쏟아내는 감탄사와

일행이 없었다면 내리고 싶은 욕망을 자제하기 힘들 정도였으니까요.

영랑의 싯귀가 아스라히 생각납니다.

"오메, 단풍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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