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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경희궁터를 찾아서...

가루라 2014. 10. 18. 11:12

내게는 또다른 의미의 왕궁이었던 경희궁터.

왕궁을 복원한 후 처음으로 찾았습니다.

 

80년대 초 현대그룹 재직 당시 우리는 인력개발원으로 불렀습니다.

서울 지리에 그다지 밝지 않았던 당시의 나는

그저 그게 현대건설이 서울고등학교를 매입하여 그룹연수원으로 쓰는 것으로만 알았었죠.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왕궁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는 건물은 없었고

일본식 교사(校舍)로 보이는 건물 뿐이었으니 말입니다.

주말이면 직원들이 운동장에 모여 부서 또는 본부나 회사 대항 축구, 야구 등을 하곤 했습니다. 

 

훗날 그 자리가 일제에 의해 무참히 헐려진 조선의 왕궁

경희궁 터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어버렸듯

이 땅의 궁궐에 남겨놓은 일제의 상체기가 너무도 크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몇몇 뉴라이트계열의 사학자들은

우리나라의 근대화에 그들이 기여했다는 견강부회식의 평가를 하지만

당시 역사의 흐름 상 전 세계가 근대화의 격랑 속에 내몰려 있던 시기였으므로

굳이 일제가 아니었어도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의 과정을 밟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땅에서 저지른 무수한 악행들을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결과론적 명분으로 덮으려 하는 것은

균형감각을 심히 상실한 역사관이 아닐까요?

<숭정전> 

1617년(광해군9)에 착공하여 1623년 완성한 조선 후기의 이궁(離宮)이었던 경희궁은

처음에 경덕궁으로 불리웠으나 1760년 영조때 경희궁으로 바뀌었다네요.

경복궁을 중심으로 서쪽에 있다 하여 서궐(西闕)로도 불렀는데

동쪽의 창경궁, 창덕궁 등 동궐과 대비되는 별칭이랍니다.

<숭정문 전경>

<숭정문 외경>

남서쪽 코너에서 담은 숭정문 

 남서쪽 코너에서 담은 숭정문

정전인 숭정전, 자정전, 융복전, 회상전 등 100여채의 크고 작은 전각이 있어서

인조로 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에 머물렀고

특히 영조는 재위기간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답니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일제에 의해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짓는 명분으로

궁궐 건물 대부분은 헐려버렸고

일부는 헐려서 저들의 나라로 실려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게 되었죠.

 

서울시는 1988년부터 시예산으로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 등 정전지역 일부만 간신히 복원하여

2002년부터 일반인에게 무료로 공개하고 나머지도 복원할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예산문제로 문화재청과 협의가 되지 않아 중단상태에 있답니다.

<숭정전(崇政殿) 정면>

정전은 임금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연회, 사신접대 등을 행하는 공식 행사장소였습니다.

특히 경종, 정조, 헌종 등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숭정전 건물을 헐어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아버려서

옛 건물은 현재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남아있고

현재의 것은 이를 복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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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방에서 담은 숭정전 

숭정전 서남방 프로필 

숭정전 서남방 전경 

<동남방에서 담은 숭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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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 동남방 전경 

숭정전 동쪽 

동남방에서 담은 숭정전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인 자정전은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입니다.

숙종 승하 후에는 빈전으로 쓰기도 했고

선왕의 어진(초상화 영정)이나 위패를 모셔두기도 했던 곳인데

일제에 의해 헐려진 것을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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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문 좌측 

자정문 우측 

자정전 동남쪽에서 

자정전 서남쪽에서 

<태령전(泰寧殿)>

본래 특별한 용도가 정해지지 않았던 태령전은

영조의 어진(御眞)이 그려지자 영조의 어진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건물 역시 일제에 의해 멸실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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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의 태령전 

영조의 어진과 천장 

태령전 출입문 

태령전 궐밖 출입문 

<서암(瑞巖)>

서암은 태령전 뒤에 있는 상서로운 바위로

일설에 의하면 왕암으로 불리우는 이 바위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광해군이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합니다.

원래 선조의 셋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동생으로 훗날 인조가 된 정원군(定遠君)의 땅이었는데

서암에 왕기가 서린다는 보고를 받고

인근을 집들을 정리하여 이곳에 왕궁을 세웠답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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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사이의 석간수

서암전경

자정전 뒷편

문무백관이 도립하던 숭정전 앞마당 전경입니다.

숭정문으로부터 비를 피해 숭정전에 다다를 수 있게 만들어진 숭정전 좌우의 회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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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회랑

좌측 회랑

우측회랑

우측 회랑

숭정문에서 바라본 도심풍경입니다.

문 밖에 우뚝 솟은 현대식 건물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궁궐도 옛모습 그대로일 수만을 없음을 말해 주는 것 같아서 씁쓰레합니다.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이 원래의 위치와 다르게

본래의 위치에서 한참을 물러서 있다고 합니다.

역사박물관 포럼에 참석했다가 아래 계단으로 올라 경희궁을 바로 다녀 오는 길이라

흥화문과 금천교를 담지 못하고 지나쳤네요.

서울역사박물관 후원의 고즈넉한 풍광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앞 광장이 역동적인 행사들로 채워지는 가을인가 봅니다.

경희궁의 옛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모사도 사본입니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제의 침략과 약탈이 아니었더라면

온전히 다 보존되어 있었을까요?

재개발이라는 명분 아래

옛날 것들을 너무도 쉽게 부숴버리는 요즈음의 시책에 비추어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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